[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24. 격투기 메달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유도 동메달을 따낸 김의태 선수와 시상식이 끝난 후 기념 촬영했다. 김 선수는 일본의 귀화 압력과 조총련의 회유를 뿌리치고 한국 대표로 출전했다.

한국이 도쿄올림픽에서 따낸 메달은 세 개다. 모두 격투기에서 나왔다. 권투 밴텀급의 정신조 선수와 레슬링 52㎏급의 장창선 선수가 은메달, 유도 미들급의 김의태 선수가 동메달을 따냈다. 세 명의 선수 가운데 가장 내 마음에 애틋한 기억으로 남은 선수는 김의태다. 김 선수는 유도인 김길용씨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한 재일동포 2세다. 김길용씨는 일제 때 일본에 살면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만큼 민족혼이 강한 사람이었다. 김 선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유도를 시작해 덴리대 재학 시절 4단까지 올랐다.

1962년 김 선수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일본-소련 친선 유도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제의를 거부한다. 그는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나는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니까 한국 선수로 출전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태극마크를 달았다. 북한이 조총련을 앞세워 북한 국적으로 올림픽에 출전할 것을 종용했지만 이 역시 거절했다. 당시 24세. 덴리대를 졸업하고 아이치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김 선수는 대학 재학 때인 61년 프랑스 파리 유도선수권대회에서 4위를 차지한 세계적인 강자였다. 당시 한국의 유도 실력은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된 유도에서 전체 4체급 가운데 3체급의 금메달을 따낼 정도로 강세를 보였다. 한국으로서는 김의태 선수가 꼭 필요했다. 한국 대표가 된 그는 올림픽을 앞두고 1년 여를 코치나 감독없이 혼자 연습했다. 한국도 경제 사정이 어렵던 때라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김 선수는 한국 선수단이 도쿄에 도착한 뒤 합류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김 선수는 한 가지를 걱정했다. 자신을 길러낸 마쓰모토 사범이 일본의 유도 감독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한 스승 밑에서 배워 서로 장단점을 훤히 아는 일본 선수와 정상을 다투어야 한다는 점을 부담스러워했다. 김 선수는 준준결승까지 승승장구했다. 2회전과 준준결승에서는 시원스럽게 한판승했다. 그러나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던 라이벌 오카노 이사오와의 준결승전에서 아깝게 판정패해 금메달을 놓쳤다. 김 선수는 오카노에게 진 뒤 자신의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나는 김 선수가 따낸 동메달이 결코 작게 보이지 않았다. 시상식이 끝난 뒤 그를 축하하면서 나는 형 중산(민완식)을 떠올렸다. 내가 유도를 각별하게 생각한 것은 중산 때문이었다. 중산은 20세의 나이로 당시 유도인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던 일본 강도관(講道館) 공인 3단 자격을 얻었다. 개성에서 직접 유도 도장을 차려 젊은이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총격을 받고 쓰러질 때까지, 중산은 유도인으로 살았다. 그런 인연이 있었기에 나는 유도에서의 금메달을 간절히 원했다. 김 선수의 동메달 만으로도 나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려움을 이기고 조국을 위해 싸웠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