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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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오후부터 조금씩 날리면 눈발이 설것이를 끝나 뒤뜰에 묶어 놓은 고양이 저녁먹이를 들고 부엌문을 나서니 벌써 소북소복 탐스럽게 쌓였다. 방에서 TV를 보던 두 아이가 내가 지른 함성을 듣고는 장갑과 목도리를 두르고 말릴 틈도 없이 현관을 빠져 나간다.
얼마 안 있어 작은 아이가 온통 눈사람이 되어 손 시려 발 시려 하며 푹 젖은 털장갑을 들고 들어선다.
문밖에 나가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든다고 혼자 공공거리는 큰놈을 들어 오라고 몇번 소리쳐도 못들은체 한다.
『주언아, 밤에 눈이 올땐 흰 영감도 함께 온단다.』
『흰영감이 뭔데요­?』
『눈속에 있는 눈귀신이지.』
엄마의 대답에 화들짝 놀란 국민학교 2학년인 큰놈이 미처 장화도 벗지 못하고 온몸에 눈을 잔뜩 묻혀 가지곤 마루위로 뛰어 오른다.
20년도 훨씬 전에 나 역시 낮이건 밤이건 눈만 내리면 동생과 함께 눈장난을 하며 딩굴다가 외할머니께서『얘들아, 흰 영감온다. 그만 들어오너라』하시면 깜짝놀라 집안으로 들어와선 우리를 불러들이기 위해 거짓말 하신 할머니 밉다고 떼를 쓰던 모습이 떠오른다.
겨울이 춥긴 해도 흰눈이 있어 즐겁던 어린시절이 내게도 무수히 있었건만 이제 두 아이의 엄마로 바뀌고 보니 눈이 오면 질척거리고 아이들 적셔오는 옷갈아 입히고 빨아 손질해야 하는 번거로움 탓에 나 역시 예전 외할머니께서 우리 형제들한테 하셨듯이 느리고 음산한 목소리로「흰 영감 온다」를 뇌고 있다.
눈이 오면 이 나이가 되어도 가슴 설레는 막막한 그리움으로 콧등이 시큰한데 콜콜 잠든 이 어린것들이야 오죽할까. 그 큰 즐거움을 흰영감을 구실삼아 유리창 밖으로만 감상할 것을 강요하는 꿈도 낭만도 메마른 엄마를 아이들이 얼마나 원망할 것인가 싶다.
한번쯤 감기가 들더라도, 옷이 온통 물 빨래가 되더라도 내일 오전에는 경포로 나가 눈 덮인 겨울바닷가를 딩굴고 달려도 봐야겠다. 이명숙 <강릉시 임당동 98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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