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을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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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의 인구는 이제 1천만명을 바라보게 되었다. 인구만을 따지면 서울은 뉴욕·동경 등과 함께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서울의 모습은 극히 일부 도심지를 빼놓고 세계적인 도시와는 거리가 먼 점들이 너무 많다. 도로망이나 상·하수도를 비롯한 시민들의 편익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지번 하나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서울만이 아니고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인구가 급증한 부산·대구·광주 등 모든 대도시들의 공통된 고민이기도하다.
서울의 경우 환도 직후인 53년 약 1백만명이던 인구가 해마다 늘어 작년엔 9백50만명을 넘어섰다.
60년의 16·78%, 70년의 15·66%는 특이한 경우지만 정부의 인구 집중 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인구 증가율은 매년 4∼5%을 기록하고 있다.
그 결과 대도시의 변두리에는 「달동네」로 불리는 인구 조밀 지역이 동장하고 그런 동네일수록 지번하나 제대로 메기지 못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인구 3만명 이상 되는 큰 동의 분동이라든지 지번의 부분적 정리 등은 있었지만, 한마디로 행정이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적절한 대응을 했다고는 할 수 없다.
서울의 맨해턴이라는 여의도가 지번을 정리한 것은 겨우 지난해 7월이다. 구미에서 1백여년을 두고 써온 방식이 도입됨으로써 여의도만은 건물 찾기가 한결 쉬워졌다.
그러나 숫자로 분동은 되었지만 봉천동이나 신림동처럼 동 하나에 인구가 몇십만명씩 되는 지역이 있는가하면 번지 하나에 1천이 넘는 가구가 모여 사는 경우가 아직 전국을 통틀어 40여개나 된다.
대구시 대신동 115번지는 무려 4천37가구에 이른다니 놀랍기만 하다.
빌딩 숲 속을 이룬 도심지나 아파트촌 주요 간선도로 주변을 빼놓고 도무지 서울은 4년 후에 올림픽을 치를 만한 도시 같지가 않다고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도시의 면모가 대형 건물의 다과나 지하철 등 교통상의 확충만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도시 기능의 다변화, 변두리 지역의 개발 등 서울시가 안고 있는 문제는 많지만 당장 해야함은 지번 하나만이라도 정리해서 주소만 가지면 서울 어느 곳이건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뉴욕·런던·파리 등 구미의 어느 도시건 웬만한 작은 번지 하나만으로 초행자라도 찾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도시에 따라 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가로를 중심해서 동서나 남북으로 숫자로 번지를 매긴다. 가령 50번 가까지 있던 도시가 인구 증가로 주택이 들어서면 거기에 맞추어 51번가 52번가 하는 식이다.
교외로 나가도 지도하나만 가지면 시골 어느 곳이건 찾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만큼 도로 표지판이 완벽에 가깝도록 정리, 정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동 중심으로 되어 있는 우리 나라에서 합리적인 지번 부여는 매우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번지 하나 바꾸는데 1백31종의 서류를 고쳐야하고 거기에 막대한 비용이 들것은 뻔하다.
새로 개발하는 지역의 지번 하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책임은 결국 행정 당국자의 단견·무계획성에 있다.
지번 정리 작업이 어렵다고 해서 미루기만 하면 선진화한 서울의 실현은 불지하세월이 되고 만다.
지하철을 건설하고 도심지를 재개발, 고층 빌딩을 지어 도시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 외형상의 선진화라면 지번을 확정하고 도로 표지판을 정리, 처음 한국을 찾는 사람이라도 지도하나만으로 가고 싶은 곳을 척척 찾도록 해주는 것은 내용상의 선진화라 할 수 있다.
전국에서 주소를 찾지 못해 되돌아오는 우편물이 한해에 9백30만통이나 되고 1개 번지에서 사는 가구가 너무 많아 워키토키까지 동원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지극히 부끄러운 측면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외래어 표기법이 통일되어 도로나 지명 표기에서 오는 혼란은 차차 가시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지번 변경 작업에도 착수되어야겠다. 지번 하나 정리 못한 체 아무리 선진화를 외쳐본들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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