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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판타지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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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여중·고 시절 순정만화와 할리퀸 로맨스에 빠져 산 탓에 성인이 되어 현실의 연애와 마주했을 땐 조금 당황했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근육을 가진, 어떤 색인지 당최 감이 오지 않는 ‘잿빛 눈동자’의 그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단지 남자라면 로맨스 소설의 흔한 남주(남자 주인공)들처럼, 다른 여자들에겐 차가워도 좋아하는 여자에게만은 한없이 따뜻하며, 거침없는 애정을 퍼붓는 생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남자, 별로 없었다.

 남자들도 나와 똑같이 약하고 찌질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로맨스 소설 속 사랑과 현실의 사랑을 구분하는 지각을 갖게 됐지만, 그렇다고 로맨스물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실의 연애에서 소설 속 연애로 종종 도망쳤다. 시대 변화에 맞춰 남주 캐릭터도 변화해 요즘 로맨스 소설에선 연상보다는 연하가, 재력보다는 체력이 강한 남자들이 인기다. ‘재벌 2세 완벽남’보단 현실성 있는 캐릭터이긴 한데 현실의 이런 남자,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해 일본에서 인기를 끈 ‘가베동(壁ドン)’도 여성들의 연애 판타지가 반영된 현상이었다. 벽이라는 뜻의 ‘가베(壁)’에 벽을 칠 때 나는 의성어인 ‘동(ドン)’을 합친 말로, 남자가 여자를 벽으로 몰고 가 팔로 막으며 “내 여자가 되어 줘” 등의 오글거리는 멘트를 날리는 행동을 말한다. 한 순정만화에 등장해 화제를 모으면서 ‘가베동 체험’까지 인기를 끌었다. 유약한 초식남(草食男)에게 지친 일본 여자들이 원하는 박력 있는 남성상을 보여준다는 해석이 다.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휩쓸고 있는 화제의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보며, 오랜만에 전형적인 구시대적 로맨스물이 주는 재미를 맘껏 누렸다. 뛰어난 외모의 재력가인 남자와 평범한 (듯하지만 옷만 갈아입으면 절세미인으로 변하는) 여주인공의 사랑 이야기. 영화의 주요 소재인 가학적 성행위 장면 때문에 화제가 됐지만, 결국 극장을 메운 여자들이 피식 웃으며 즐거워하는 대목은 이런 거였다. “나를 멀리하는 게 좋아”라며 여자를 밀어내던 남자, 어느덧 그녀에게 빠져들어 헬리콥터 안전벨트를 매주며 말한다. “이제 어디에도 못 가.”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하는 시대, 이 영화가 때론 복종하고 싶은 여성들의 심리를 자극한다는 분석,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 때문에 성 문화가 왜곡될까 우려된다거나 등등 너무 정색하는 걱정은 우스꽝스럽다.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 어른들에게도 현실을 잊고 빠져들 판타지는 필요하니까.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