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20. 이산가족 도쿄 상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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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준씨右가 한국전쟁 때 헤어진 딸 금단中을 1964년 10월 8일 도쿄에서 만났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한은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을 여러 차례 했다. 장소는 제3국인 홍콩과 스위스 로잔이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남북단일팀 구성이 거의 불가능했다. 예상대로 회담은 결렬됐다. 북한은 '지역 대표'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다. 북한 선수들이 일본에 도착한 날은 대회 개막을 닷새 앞둔 1964년 10월 5일 오전 10시. 230여 명의 선수단 가운데 1진 144명이 소련 선적 야쿠치야호를 타고 니가타 중앙부두에 도착했다. 800여 명의 조총련계 동포들이 환영했다.

그러나 북한 선수단은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소련은 63년 11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공산권과 비동맹 국가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네포(GANEFO) 대회를 열었다. 그러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 대회가 안티 올림픽 성격이 짙다'고 결론지었다. IOC는 가네포 대회 출전 선수들에 대해 올림픽 참가 자격을 1년간 정지시켰다. 이에 따라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TOOC)도 64년 10월 7일 가네포 대회 육상 3관왕인 신금단을 비롯한 북한 선수 여섯 명에 대해 참가 자격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음날 올림픽 불참을 선언했다.

북한의 올림픽 보이콧은 우리 민족에게 분단의 아픔을 곱씹게 한 계기가 됐다. 분단 이후 처음 이뤄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엉망이 된 것이다.

한국전쟁 때 헤어진 신문준.금단 부녀의 14년 만의 만남이 두 사람의 절규 속에 7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9일 오후 4시55분.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조선회관'에서였다. 북한 선수단이 철수하려는 순간 서울에서 달려온 아버지가 딸을 끌어안은 것이다.

"금단아!"

"아버지!"

아버지 49세, 딸 26세. 비명같은 외마디를 토하는 순간에는 분단도 이념도 없었다. "엄마는, 그리고 동생들도 다 잘 있겠지?" 겨우 정신을 차린 아버지가 입을 열자 딸이 대답했다. "다들 잘 있어요. 걱정 마세요." 시간은 빠르게 달아났다.

"자, 신금단. 시간 됐어." 조총련계 사람들이 아버지와 딸 사이를 파고들어와 둘을 떼어 놓았다. 신금단은 우에노역으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으며 외쳤다. "아버지 잘 가오!"

아버지는 우에노역까지 따라갔다. 거기서 딸의 얼굴을 3분 더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신씨 부녀의 상봉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도쿄올림픽 한국 선수단의 재일동포 후원회장인 이유천씨가 64년 8월 하순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세브란스병원 직원이던 신문준씨는 한양대 체육학과 이돈수 교수와 함께 이 회장을 찾아갔다. 가네포 대회에서 신금단이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신씨는 딸을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이 교수를 알게 됐다. 이 회장의 주선으로 신씨는 9월 중순 도쿄로 갈 수 있는 초청장을 손에 넣었다.

세계적인 육상 스타였던 신금단은 올림픽 개막을 며칠 앞둔 10월 7일 저녁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아버지가 계시다"고 공개했다. 이 사실이 국내에 전해지고 신씨는 다음날 노스웨스트 항공 편으로 도쿄로 날아갔다. 하지만 북한 선수단이 대회 보이콧을 결정한 뒤였다. 이유천 회장이 발벗고 나섰다. 무라이 TOOC 사무차장을 통해 북 측과 힘든 협상을 한 끝에 오후 4시45분 합의했다. 북한 선수단이 도쿄를 떠나는 시간은 오후 5시50분. 신씨는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조총련회관 건물로 달려갔다.

그는 1.4 후퇴 때 고향인 함남 이원을 떠나며 헤어졌던 딸과 14년 만에 상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녀는 단장의 아픔을 안고 다시 남북으로 갈라졌다. 신씨는 두고 온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은 채 83년 저세상 사람이 됐다. 올해 67세가 된 신금단은 북에서 체육지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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