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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세계에서 출발 세상을 구원하는 신화의 세계로 접속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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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호 14면

톨킨

『반지의 제왕』을 쓴 존 로널드 로웰 톨킨(J. R. R. Tolkien, 1892~1973)은 사후에 명성을 더해 가는 인물에 해당된다. 그를 둘러싼 숭배 현상은 일찌감치 시작됐다. 1965년 미국에서 해적판 『반지의 제왕』이 출간되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매니어 팬들이 생겨났다. 톨킨은 서둘러 개정 부분이 삽입된 ‘정식’ 페이퍼백을 출간한다. 68년 초 BBC에서 ‘옥스퍼드의 톨킨’이라는 다큐를 제작하면서 숭배 현상은 절정에 이르렀고, 톨킨은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로 답했다. “살아 있을 때 숭배 받는 인물이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사람을 거만하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경우에는 어찌되었건 저를 극히 위축되고 서툴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겸손한 우상이라 해도 추종의 달콤한 향기에 조금이나마 만족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겠지요.”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0> 톨킨과 『호빗』

평소 기계를 다루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던 톨킨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자신의 문장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경이를 표했을 것이다. 피터 잭슨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반지의 제왕’은 새로운 클래식이 되었고, 최근에는 ‘호빗’ 3부작이 영화로 나왔다. 상업적 판단에 따른 것이긴 하겠지만,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호빗’의 이야기를 3부로 길게 늘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난해 연말에 개봉된 ‘호빗’의 마지막 편에서 난쟁이들의 전투는 지루했고, 스마우그(용의 이름)의 최후는 싱겁게 끝이 나버렸다.

영화 ‘호빗’

미국서 출간한『호빗』최고의 어린이 책 명성
그러나 『호빗』은 톨킨이 평범한 교수에서 작가로 변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작품이다. 조지앨런앤드언윈 출판사의 수전 대그널은 톨킨의 제자였던 일레인 그리피스로부터 톨킨이 쓴 동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원고를 받아 들고 런던으로 돌아온다. 건네받은 원고는 미완성본이었고, 용이 죽은 다음의 이야기가 빠져 있었다. 톨킨이 완성본을 내놓은 것은 36년 10월의 일이다. 타이핑한 원고의 제목은 ‘호빗, 혹은 그곳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다. 출판사의 의견에 따라 톨킨이 직접 그린 삽화가 삽입되고 수정이 가해지면서 최종적인 교정쇄를 만들어내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꼼꼼하기 이를 데 없던 톨킨의 작업을 통해 『호빗』은 37년 9월 21일에야 출판된다.

이 책은 출간 즉시 친구인 C. S. 루이스의 서평을 포함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초판이 매진되기에 이른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 포장된 『호빗』은 몇 달 뒤 미국에서 출간돼 최고의 어린이책으로 ‘뉴욕 헤럴드 트리뷴 상’을 받는다. 그 후에 『반지의 제왕』이 나오면서 『호빗』은 어린이책을 넘어서는 중간땅의 신화로 재편됐지만, 이 책의 시작은 분명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에 대해서는 톨킨의 증언이나 기록에 여러 판본이 있다. 30년 무렵 아버지 톨킨은 서재에서 아이들에게 빌보 배긴스라는 호빗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모험담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지금 알려진 것과 다른 것이 있다면 용의 이름은 ‘프리프탄(Pryftan)’이었고, 난쟁이들을 이끄는 대장은 소린이 아니라 오늘날 가장 유명한 영화 캐릭터 중 하나인 ‘간달프’였다. 『호빗』이 유명세를 타면서 톨킨은 호빗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나는 키만 빼놓고는 사실상 호빗입니다. 정원과 나무들과 기계화되지 않은 시골을 좋아하지요. 담배를 피우고 맛있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지만 프랑스 음식은 질색입니다.”

“땅 속 어느 굴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문장은 영국 시골 사람 혹은 중산층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시류에 의해 골목쟁이 빌보는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마법사 간달프와 난쟁이들의 방문을 맞이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운명의 여정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빌보는 수수께끼를 통해 골룸으로부터 신비한 반지를 얻고, 위험을 극복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빌보는 칼 잘 쓰는 영웅이기보다는 꾀 많은 영웅에 가깝다. 그러나 빌보의 지혜는 중간땅에 불어닥칠 미래를 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소 모자라고 사소한 감정들이 작은 호빗을 채우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 세상 구원하는 신화
『호빗』의 성공 덕분에 톨킨은 평소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본격적으로 그려나갔다. 『호빗』출간 이후 구상을 시작한 『반지의 제왕』은 골룸으로부터 얻은 반지의 과거와 현재를 재구성하면서 난쟁이, 요정, 인간, 호빗, 그리고 트롤을 비롯한 온갖 캐릭터들이 사는 중간땅의 면모를 담았다. 악의 화신 사우론이 부활하자 중간땅의 캐릭터들이 연합한 반지원정대가 결성돼 여정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번에도 위기를 타파해야 할 최종 임무는 마법사나 요정 혹은 왕의 후계자가 아니라 작고도 작은 호빗에게 부여된다. 『반지의 제왕』첫 장의 제목은 ‘오랫동안 기다린 파티’인데, 이 제목은 『호빗』의 첫 장인 ‘뜻밖의 파티’로부터 따온 것이다. 『호빗』의 주인공 빌보가 모험 중 우연히 반지를 찾아내 위기 때마다 요긴하게 활용했다면,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이자 빌보의 조카인 프로도는 불의 산에 반지를 던져 없애 버려야 한다. 절대반지가 악의 손에 들어가면 세상은 파멸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짝을 이루면서 두 호빗의 모험담을 들려주었고,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구원되는 이야기의 신화를 이루었다.

톨킨은 작가이자 영문학자이며 언어학자다. 그는 북유럽의 신화와 옛이야기의 형식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대에 사라진 ‘신화’를 복원하려고 했다. 거기엔 일찌감치 고아가 되어 버린 개인사와 11랭커셔 퓨질리어 연대보병대의 하급 장교로 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 중 하나인 솜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도 영향을 미쳤다. 적군의 포화를 뚫고 전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솜 전투의 첫날 약 6만 명의 영국군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톨킨은 인간적인 가치를 담은 이야기의 형식을 고민했고, 현실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2차 세계라 부른 중간땅을 통해 세상의 모순과 어둡고 밝은 면모들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그것은 판타지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이었다. 그리고 톨킨은 이를 통해 철학적, 종교적 비전을 선포한 것이다. “판타지는 유사 이래로 줄곧 인간의 권리였다. 우리는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히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의 형상대로 비슷하게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허락된 능력의 범위 안에서 이차적인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 있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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