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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 원 돈봉투 들키자 500만 원으로 입막음…정치권 뺨치는 선거 비리

중앙일보

입력

오는 11일 농·수협 및 산림조합 조합장 선거가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된다. 279만여 명의 조합원이 투표에 참여하는 이번 선거는 지난달 26일 선거운동을 공식 개시했다. 전국 1326개 조합에서3520명의 후보자들이 출마한 이번 선거는 평균 2.7대 1의 높은 경쟁률 속에 전국 곳곳에서 치열한 선거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번 선거는 후보자 수만으로 보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특히 전국에서 조합장선거가 같은 날에 치러지는 것은 1989년 직선제를 도입한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부정선거를 방지하고 선거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선거 현장에선 각종 비리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후보들 사이에서는 “조합장 선거가 예전보다 더 혼탁해졌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 현장을 진단해본다.

#‘따르르릉~’ 지난달 6일. 대구 달성군에 사는 배모씨는 안부 인사차 지인 장모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배OO인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씨가 대뜸 돈 얘기를 꺼냈다. “내 강 후보한테 50만원 받았는데, 선거 날에 집에 들리라. 니 포함해 10만원씩 나눠줄 끼다” 가만히 이를 듣던 배씨는 전화를 끊었다. 장씨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을 깨닫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배씨는 받지 않았다. 얼마 뒤, 물어 물어 배씨를 직접 찾아 온 예비후보자 강씨는 돈 봉투를 뿌린 사실을 눈감아주고, 자신의 선거운동을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리고는 500만원을 꺼내 배씨의 주머니에 억지로 찔러 넣었다.

최근 대구 달성군의 한 조합장 선거에서 벌어진 일이다. 배 씨는 결국 강 씨로부터 받은 500만원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했다. 강씨는 다른 조합원들에게도 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검찰에 구속됐다. 대구시선관위는 배 씨에게 법정최고액인 1억원의 포상금을 지급했다.

선거 업무를 위탁관리하고 있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기준으로 이번 선거에서 각종 불법 선거운동혐의로 적발된 건수는 총 437건에 달했다. 선관위는 이중 88건을 고발하고, 18건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나머지 331건의 관련자들에 대해선 경고 조치했다. 최관용 중앙선관위 언론팀장은 “과거 개별적으로 선거를 치를 때와 비교하면 위반 건수는 줄었지만 고질적인 ‘돈 선거’ 행태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돈봉투 신고자에 포상금 1억원 지급
불법선거 유형도 각양각색이다. 가장 흔한 건 ‘금품살포형’이다. 충남 논산의 농협조합장 출마예정자 김모(55)씨는 지난해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조합원과 가족들에게 6000여 만원을 돌린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선거에 미칠 영향력에 따라 1인당 20만원에서 최대 1000만원을 뿌렸고, 돈봉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된 사람만 지금까지 150여 명에 달한다.

본인의 당선을 위해 경쟁자의 출마를 사전에 차단하는 ‘담합형’ 후보자도 있다. 전북 부안지역의 농협조합장 권모(61)씨는 자신의 재선을 가로 막는 강력한 경쟁 상대였던 입후보 예정자에게 “출마하지 않으면 1억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2천700만원은 주선자를 통해 미리 건네줬고, 나머지는 조합장 당선 후에 주기로 했다가 선관위에 적발됐다.

이와 반대로 경남 모 지역의 축협 조합장 선거에 나서려던 어모씨는 현직 조합장에게 “선거에 나오지 않으면 2억 원을 주겠다”고 제안하고 5000만원을 건넸다가 검찰에 구속됐다.

금품살포·사전담합에 미행까지
후보 간에 비방전이 가열되는 상황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1월 16일 전남 광양시의 한 모텔 앞에서 벌어진 일이 그랬다. 당시 농협조합장 장모(63)씨는 차를 몰고 모텔을 빠져나가던 중 갑자기 돌진해온 차량에 충돌사고를 당했다. 경찰 조사 결과, 사고를 낸 운전자는 경쟁 후보의 사촌동생인 강모(51)씨였고, 차량에는 후보의 친동생도 함께 타고 있었다. 경찰은 강씨 등이 장씨를 미행하던 중 모텔에서 몰래 나오는 것을 보고 사생활에 대한 약점을 잡기 위해 일부러 사고를 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장 단속이 쉽지 않은 조합원 선거의 특성을 감안할 때 적발된 부정선거 건수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주장도 있다. 조합장 선거에 출마한 이모 후보는 “1표당 50만원을 쓰면 당선되고, 40만원을 쓰면 떨어진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며 “상당수의 후보가 공공연하게 돈을 뿌리고 다니는 건 선거판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윤동수 대구 달성군 선관위 지도홍보계장은 “조합원들이 서로 잘 아는 사이기 때문에 선거부정행위를 신고했다가는 자칫 배신자라고 낙인 찍힐 수 있어 이를 드러내길 꺼린다”며 “후보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지만 단속이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깜깜이 선거’가 돈 선거 조장
조합장 선거에서 각종 비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전북 정읍시 농업협동조합장 후보인 허수종(44)씨는 “조합장 선거엔 ‘선거 바람’이란 게 없다”며 “정당 등과 같은 조직을 통해 자신을 알릴 기회가 없다 보니 돈 선거와 같은 음성적인 유혹에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2년 전 출마 때에는 합동연설회를 통해 조합원들에게 ‘나’라는 존재를 알릴 수 있었지만, 이번엔 그런 기회마저 사라지는 바람에 지난 선거보다 더 불투명하고 혼탁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국동시조합장선거를 치르기 위해 지난해 제정된 ‘공공단체 등 위탁선거에 관한 법률(위탁선거법)’에 따르면, 조합장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은 공개토론회나 합동연설회를 할 수 없다. 외부기관이 토론회를 주최하면 조합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고, 연설회장에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등 부작용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일반 공직선거와 달리 예비후보 등록을 할 수 없고, 후보자 본인 외에는 누구도 선거운동을 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이 때문에 일선 선거 현장에서는 이번 조합장 선거가 ‘깜깜이 선거’로 전락했다는 불만이 많다. 조합장 선거에 처음 출마한 박용석(54) 임진농협조합장 후보는 “갈 수 있는 곳이 마을회관 정도밖에 없다 보니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조합원들을 직접 만나기 어렵다”며 “주머니를 묶는 건 동의하지만, 그래도 입은 열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경기 연천군의 고덕균(60) 조합원은 “열흘 뒤면 투표를 해야 하는데 아직도 후보가 누군지도 모르는 조합원들이 많다”며 “아무래도 인지도가 높은 현직 조합장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비후보자 제도를 도입하는 등 선거운동 방식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호중 좋은농협만들기운동본부 연구기획팀장은 “돈 선거를 막자고 도입한 동시조합장선거 제도가 과도한 제약 때문에 조합원들의 알 권리까지 침해하면서 오히려 돈 선거를 조장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다”며 “합동토론회 실시등 정책선거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선거운동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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