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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평강·인촌 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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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채씨는 인구순위 51번째로 남한에만 10여만명을 헤아린다.
고려중엽의 채송년을 시조로 하는평강,채선무를 시조로 하는 인천의 두 본이 있다.그러나 모두 한 혈통으로 여기고있다.

<중국 주문왕의 칠남>
채씨의 원뿌리는 중국 춘추시대 채국에 봉함을 받은 주문왕의 일곱째아들 채숙도다.후손 채원광이 신라 내물왕 (356∼402넌) 때 신라에 와 내물왕의 부마가 되고 우리나라 채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입증할 문헌이 없어 확인할 길은없다.
평강과 인천,분파의 정확한 연대도 확실치않다.
고려의종24년(1170년) 「정중부의난」때 문신들이 대량학살 당하고 문인들이 흩어진 탓이다.
평강채씨는 최충헌집권시 발탁돼 고종(1214∼1259년)때 문하시낭평장사(정2품)에 오른 채송년을 시조로 하고있다.
송년의 두아들 정 (평장사) · 화(평장사) , 손자 인규 (도험의중찬) · 모(중서대랑평장사),성 (동) ,증손 종린(정승)·홍철(동)등 모두가 재상의 위치에 울라 「8정승」을배출해냈다.
인천채씨는 고려중엽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채선무를 시조로 한다.선무의 아들 신징은 대장군은청광녹대부에 봉해졌다.
또 채보문은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으며,채귀하는 정몽주와 교우하고 공양왕때 호조전서로 있다가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불사이군의 충정으로 두문동에 은거,「두문동72현」의 1인이 됐다.
여말 세상에 이름을 앝린 채씨는조선에 들어 문과급제자만 70명에 이른다.이가운데 채수는 21세때 관시·회시·전시에 모두 장원해 명성을 떨쳤다. 채수는 성종때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당대의 권신이던 임사홍의 비행을 탄핵했다.후에 한성부윤· 춘추관기서관· 대사헌· 예조참판을 역임한 채수는 중종반정 (I506년)이 일어나자 버슬을 버리고 낙향, 시와 함께 여생을 보냈다.· 성품이 강직하기로 이름난 채수의손자 채무일은 시문에 빼어났다.4살때 할아버지가 「손자는 밤마다 글을 읽지 않는구나(손자야야독서부)」고 하자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술을몹시 마신다 (상부조조음주맹)」고 그자리서 댓구, 「천재」 의 면모를 보였으며 눈이내리는것을 보고 그자리서 「개가 달리니 국화가 피고, 닭이다니나 대나무잎이 피네 (견주국화발계해죽엽성)」라고 읊어 오랫동안사람들의 화제가 됐다는 시화를 남겼다.

<왕앞에서 사필뺏어>
채씨는 조선시대 채세영 채유후 채제공등 명신·명상을 남아 더욱 빛난다..
임진당 채세영은 여말의 정승 채종린의 7대손으로 중종∼명종때 벼슬하여 호조판서·좌참찬을 지냈다.중종14년(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등 사림이 화를 입게되자 춘추관기사관이던 채세영은 즉시 입궐, 정광필 (영의정) , 남식 (예조판서) 등에게 사건의 원인을 물었으나 대답치 못하자 승지로부터 사단을 빼앗아 든채 중종임금에게 『저는 간신이 아니어 소임밖의 일을 아뢰는 것은 죄가 되나 이자들이 무슨 큰죄를 지었기에 이러는지 죄명을 듣고 싶습니다』 라고 말해 「임금앞에서 사필을 빼앗은 사람하란 별칭을 들었으며,기묘·을사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나 채세영만은 홀로 남았다.

<『명재상』채제공도>
채유후는 인조1년(1623년)문과에 장원,효종때 대제학·대사헌을 지내고 현종조에 이조판서를 지낸 명신.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채제공은 영조19년(1743년)문과에 급제,
정조초에 이르기까지 도승지와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남인의 영수었던 그는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우의정·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10여년동안 재상의 자리를 누리며 정치·경제·사회·문화등 각분야에 두루 업적을 남겼다.
특히 당시에 정치·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임진왜란에서 채씨가는 채홍국·채우령·채인달등 33인이 호남등지에시의병으로 활약,왜구와 싸우다 순국했다.

<호란항거한 채성귀>
병자호란때는 채성귀가 끝까지 항거를 주장하다 마침내 화친이 이루어지자 버슬을 버리고 낙향하는등 의절의 기골도 채씨네의 전통.
숙종때 채이혁은 민비폐비의 부당함을 간언하다 유배당하기도 했다.일제하 채상덕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다 집안현 우마령에서 일군의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채기중과 채응언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현신한 투사들.
소설가 채만식은 채씨의 문재를 이었으며, 작곡가 채동선은 여러편의 예술가곡으로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개척자가운데 한사람이 됐다.
해방후 채씨들은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다.현재 정계에는 채문식국회의장이 활약중.학계에는 채수한(영남대) 채중묵 (전북대) 채정수 (동아대) 채중기 (영남대) 채제천(단국대)채선엽 (이대) 등이 있으며 채낙균(재미)는 미국에서 활동중.
법조계에는 채방은(서울지검)채수철(법무부)등이 검사로,채태병(서울지법) 채규성 (수원지법) 채영수 (서울지법동부지원)가 판사로 재직중.
월남전당시 주월한국군사령관이었던 채명신은 브라질대사를 거쳤고 채의석은 주튀니지대사.
평강과 인천 두본으로 나뉘어었으나 서로 한뿌리임을 강조,채씨대종회를 조직해 두집안간의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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