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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87 >글 문병호기자 사진 양원방기자|금성범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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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백리는 누구며 나는 누구냐/저문날 홀로서 눈물 흘리네/수양산바라며 굳힌 한마음/푸른하늘 우러러 부끄럼 없네.』
사문동 문을닫고 숨으렸더니/슬프다이내몸 감출데 없어/하루아침 불길에 타버린 빈터/고향에나 돌아가 내삶을 쉴꺼나.』
고려조 5백년 왕업이 가을풀처럼 이울던 14세기말, 두 임금을 섬길수 없는 지식인의 양식을 지켜 후세의스승으로 선 복애 범세동-. 그는 6백여년 역사에 6백여가구, 가늘고 끈질기게 가통을 이어온 금성범씨가의 정신적 지주다. 그의 「오직 한사람」정신은 충으로, 어떠한 위협과 폭력에도 굽히지않은 기개는 의열의 투혼으로 후손들에게 이어져 수는 적으면서도 김성범씨는 그 존재를 전국에 알려온 호남의 선비집안이다.
복애 범세동은 이성계가 끝내 폭력으로 정권을 뺏어 조선의 태조가 되자 새질서에의 추종을 거부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개성근교 사문동에 숨었다. 그러나 새왕조는 새왕조의 권위를 부정하는 지식인들의 침묵시위를 두고보지만은 않았다. 72현이 은거해 모인 사문동에 불을 질러버렸다.

<8대까지 독자로>
범세동은 불타는 사문동을 빠져나와 빈터를 내려다보며 부조현 고개마루에서 앞의 시 한수를 짓고 남도천리 금성(전남나주)에 낙향했다. 김성은 우리나라 범씨의 시조인 그의 증조할아버지 승조가 터잡은 고향. 범씨는 원래 지나의 성씨다.
춘추전국시대 월왕 구천의 패업을 이루게한 범인, 한고조 유방과 천하를 다투던 항우의 거사로 그의 말을 들었던들 천하가 항우에게 돌아갔으리라는 범승등 위인걸사들을 숱하게 배출한 지나의 명문이다.
승조는 송나라의 높은 벼슬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때마침 「징기즈칸」의 영도아래 몽고족이 일어나 유라시아를 석권하는 난세를 만나 그의 조국 송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겪었다. 지나는 한족왕조와 북방정복자의 왕조가 교대하는 전례를 따라 몽고의 지배아래 떨어졌다. 승조는 고려 충렬왕때 원의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고 고려에 올때 정이천의 역전, 주자의 사서집주, 백가례설등 문헌을 가져와 널리 소개했다.
승조는 말년 전남나주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아들 유해 주가 충연왕때 문하시랑(종2품)의 높은 벼슬에 오르고 여진토벌서 세운 공으로 금성군의 봉군을 받아 가문의 기반을 다졌으며 이후 후손들이 본관을 금성으로 쓰게된연유다.
이럽게 한국에 뿌리를 내린 범씨는 시조로부터 8대를 독자로 이어내려오는 기연을 짓는다.

<제국공주수행 귀화>
후손들은 중간에 어느 한사람이라도 자손을 못남겼거나 별난 성씨대신 흔한 성으로 바꾸었더라면 우리나라에 범씨가 없었을텐데 2∼3대도 아니고 8대씩이나 외아들이 데를 이어 가통이 끊어지지 않은것은 하늘의 뜻이면서 범씨가의 긍지와고집을 나타낸게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김성범씨의 중조격인 4대 범세동은 통예문통찬을 지낸 후춘의 아들로 안향·정몽주의 문하에서 배웠다.
공민왕때 과거에 급제, 덕령부윤·연의대부등 관직을 역임했는데 이성계의 쿠데타가 나자 사문동에 숨었다가 고향 나주에 은거, 여생을 마쳤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그의 학문과 인물을 아껴 여러번 불렀고 그와 같은연배 계원이었던 태종 이방원은 대사성을 제수하기까지 했으나 그의 지조를 굽히진 못했다. 원천석·이승인등 고려의 옛동지들과 교류하며 학문연구로 그는 여생을 보냈다.
『화동인물기』 『화해사전』 등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화해사전』에서는 고려의 우왕·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새왕조측의 흑색선전이 거짓임을 밝혀 후세에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의 분위기로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라고도 할수있었다.
뒷날 성삼문·박팽년·이황등은 그의 이 직필의 용기를 찬양했고 그의 충절이 조선조 사림들의 더욱 기림을 받게됐다.

<태조도 지조못꺾어>
뒷날 그에게 문충공의 시호가 내려지고 순조때는 개성 표절사에 배향됐으며 다음해인 1825년에는 광주에 그를 모시는 복용사가 호남유림들의 발의로 세워지기도 했다.
복애의 새왕조 충성거부와 낙향으로 벼술길과 인연을 멀리한 금성범씨가는 농사에 힘쓰며 수신제가의 학문을 닦는 선비가문의 전통을 세워왔다.
9대째에서 2백여년 「외아들」전홍을 깨고 형제가 된 범씨는 이후 수가 다소 늘어나 본고장 나주에서 인근 광주등지로 옮겨간다. 범씨가의 충렬전통이 다시 빛을낸것은 임진왜난의 국난에서. 범기생과 동생 기봉의 형제가 감연히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1593년6월 진주대전에서 김천익·최경회·고종후등 의병장, 6만군민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 순국했다.
선무원종공신이되고 기생은 이조참의, 기봉은 좌승지의 벼술이 내려졌다. 이들 형제의 아버지인 범천배와 천배의 종조부인 가용등은 성리학자로 인근에 알려졌던 인물. 그밖에도 범종박·범혁조·범치곤등이 역시 그학문과 인품으로 호남일대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김성범씨의 성지인 광주 복룡사는 문충공 범세동과 가용·천배·기생·기봉등 5명의 범씨명인 위패를 모셨다. 일제침략기 범씨가의 충의정신은 또다시 항일투사를 낳는다.
광주 3·1운동의주구동적역할을했던 범윤두는 거사후 일경의 수배를 받고도 10여년을 숨어다니며 공소시효를 넘긴 집념의 투사였다.

<일제때도 타협거부>
일가친족 가운데 생활을 위해 일제의 교사나 공무원이 된 사람을 보면 일제의 하수인노릇한다고 늘 꾸짖고 사람으로도 여기지않았다고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그 매운기상을 추모한다.
일제가 망할때까지 끝까지 타협을 거부하고 가능한 모든 저항을 그치지 않았던 그는 가난과 병고에 시달려면서도 그토록 소원하던 해방을 본 뒤 돌아갔다. 현재 김성범씨는 전국에 6백여가구 3천여명을 헤아린다.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북과 서울에 주로 분포했다. 북한에는 특히 단한가구도 없는 이남성.
수는 적은대로 뼈대있는 가풍을 이어 학계에 범대순 (전남대·영문학)범선균 (전남대·중문학) 교수가 활약하고있고 범택균 목포시장이 관계에있다.
▲다음주는「은진 송씨」

<지명인사>
▲범시균(종친회장·전경찰서장)▲범택균(목포시장)▲범대순(전남대교수)▲범선균(전남대교수)▲범대규(전남유도회이사)▲범진규(재일교포실업인·동경수관광사장)▲범희천(총경·치안본부근무)▲범성균(영산포여상교장)▲범잼민(전국교교장)▲범희길(종친회고문)▲범관식(〃)▲범백균(〃)▲범세균(〃)▲범재동(재일신옥단경영)

<종친회제공·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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