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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 '눈'으로 쓰다] 3.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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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달 26일 아침, '줄기세포 임상시험'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찾아 승일은 병원으로 향했다. 내게도 기적이 올까. 두근거리는 찰나, 구름 사이로 흘러내린 햇살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입가에 번지는 눈물겨운 미소. 어머니도, 호흡기를 잡고 있던 누나도 걸음을 멈췄다. 승일은 되뇌었다. '정말간절한내마음, 살고싶다…'. 박종근 기자

막다른 길의 끝이 죽음이라면, 기댈 것은 기적뿐이다. 루게릭병 환자와 그 가족이 그렇다. '어딘가에 치료법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절망과 혼돈을 헤쳐나간다.

의료계가 포기한 난치병을 환자 부모가 찾아낸 방법으로 치료한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미국 영화 '로렌조 오일'. 사람들은 루게릭병을 치료할 제2의 로렌조 오일을 찾아 헤맨다. 다음은 환자들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쓴 민간요법이나 많은 돈을 주고 검증 안 된 약을 복용한 사례들.

"지난 2년여 동안 다단계회사가 파는 파동수(水) 등을 닥치는 대로 먹어 봤다."

"3300만원 주고 태반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주사로 맞았다."

"더 나빠지지 않는다고 해 웅담 성분이 섞인 약물을 6개월간 복용했다."

4년째 투병 중인 루게릭병 환자 정모(49)씨도 지난해 초 잠시 기적을 기대했다. 치료법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때 민간요법 치료사를 자처하는 사람이 나타나 "이 약을 먹으면 금방 낫는다"며 약을 건네주고 갔다. 하지만 그 약에는 비소가 섞여 있었다. 복용 석 달 만에 그는 병원에 실려갔다. 응급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났지만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중증 루게릭병 환자인 박승일(34.전 연세대.기아차 농구선수)씨와 그 가족도 기적을 찾고 있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2002년 6월, 병원에서는 원인도 치료법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때부터 벌침 요법, 기공 치료, 생식, 웅담 복용 등 몸에 좋다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한번에 세 가지 이상의 치료법을 병행한 적도 있다. 하지만 병세는 갈수록 나빠져 갔다. 승일이 보내온 e-메일에는 기적을 찾아다니다 입은 마음의 상처가 담겨 있다.

수많은검증되지않은사기성의료행위로

그나마없는재산깡그리거덜내고

가족은하나하나귤껍질벗겨지듣흩어지고

남은건슬모없는비겟덩이와썩어들어가는몸과마음쁜

2002년 12월 하순, 하반신만 마비됐을 때 승일은 새로운 치료를 받았다.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했다는 중국 동포가 어머니를 보챘고, 어머니는 승일의 반대에도 치료를 강행했다. 중국 동포는 "루게릭병에는 이 방법뿐"이라며 승일의 복근에 대바늘을 꽂고 속을 후벼팠다. "몸속의 죽은 근육을 다 끊어버려야 새 근육이 돋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3일 만에 치료는 중단됐고 승일의 피부는 벌겋게 부어올랐다. 이후 승일은 혼자서는 몸을 뒤척일 수 없게 됐다. 어머니는 가슴을 쳤다. 요즘도 승일의 배에 남은 붉은 흉터를 볼 때마다 "내가 큰 죄를 졌다"며 눈물을 삼킨다.

올해 5월 승일은 황우석 교수가 영국의 이언 윌머트 박사와 루게릭병 치료를 위해 줄기세포 연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장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마음을 달랬다. 대신 승일은 자신의 인터넷 팬카페에 황 교수와 윌머트 박사 사진을 올렸다. 제목은 '내일을사는이유'였다. 승일은 얼마 전 황 교수에게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e-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한양대병원 병동 1508호. 승일의 엉덩이뼈에 지름 3mm의 주삿바늘이 꽂혔다. 뼈를 쪼개는 통증에도 얼굴은 일그러지지 않았다. 살이 쭉 빠져 더 길어보이는 다리 역시 미동조차 없다. 잠시 후 주사기에 빨간 골수 20cc가 차올랐다. 승일은 이날부터 한양대병원 신경과 김승현 교수팀의 줄기세포 응급 임상시험에 참여한 것이다.

희망…

기적…

정말세상에존재하는단어일텐데

그냥인간이만들어낸단어가아니길…

김 교수는 식품의약품안전청과 한양대 윤리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루게릭병 환자 8명의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루게릭병의 비밀은 그가 풀어야 할 숙제이자 환자들의 족쇄를 풀어줄 열쇠다. 김 교수는 입증 안 된 줄기세포 치료에 수천만원씩 쏟아붓는 환자들의 처지가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환자들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 김 교수는 "아직은 치료라기보다 치료법을 연구하는 단계"라며 말을 아꼈다.

승일의 가족은 주어진 기회에 감사할 따름이다. 발가락 하나 까딱하는 데 그친다 해도 괜찮다. 아버지 박진권(67)씨는 "3년반 동안 몸이 굳기만 했는데 다시 살아나려면 최소한 그만큼의 시간은 걸리지 않겠느냐"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10년, 20년이 걸리면 어떤가. 작은 희망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승일이 하는 일이 있다. 몸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 언제나 나아진 것은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란다. '내게도희망이.' 줄기세포 치료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고, 민간치료법에는 수도 없이 속았다. 그는 자주 독백한다. '기적은 올까.'

몸은 콘크리트처럼 굳었고 목소리는 완전히 잃었다. 그럼에도 승일과 그 가족은 세상과 연결된 끈을 놓지 않았다. 힘겹지만 안구마우스로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승일, 그의 곁에서 3년반 동안 24시간 간병하며 치료법을 찾아다니는 그의 부모. 이들의 삶이 바로 매일 일어나는 기적인지도 모른다.

승일이 기자에게 보낸 마지막 e-메일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지금날보면

독거노인과별반차이가없을정도로

그러나천만다행으로난세상의끈을놓을생각이없다

난늘준비한다

세상에다시나설

날기억하게

난오늘도내흔적을남긴다내작은세상인터넷카페에

※박승일씨는 '안구 마우스'(눈의 깜박임을 문자로 인식하는 장비)의 도움을 받아 e-메일을 썼습니다. 사용하는 데 엄청난 힘이 들어 띄어쓰기를 하지 못하고 군데군데 철자가 틀리기도 했습니다. 작성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가급적 그대로 실었습니다. 기사 중 굵은 궁서체는 e-메일 내용.

■ 루게릭병 환자들의 소망
"전문 요양소라도 있었으면 …"

루게릭병 환자들의 가장 큰 소망은 병이 완치돼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루게릭병은 현재로선 나을 수 없는 질환이다. 그래서 나온 현실적 소망이 마음놓고 지낼 수 있는 공간, 요양소를 건립하는 일. 루게릭병 환자들은 24시간 간병을 받아야 한다. 그 가족들은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

지난해 여름 승일의 어머니는 한국루게릭병협회 김진자(64.여) 부회장과 함께 강원도 횡성을 찾았다. 영동고속도로 새말 톨게이트 부근에 있는 그들의 1000평짜리 희망…. 요양소 부지를 보고 두 사람은 잠시 고단한 삶을 잊고 미소를 지었다. 2002년 가을, 주부 박성미(47)씨가 루게릭병 환자와 가족들에게 기증한 땅이다. 박씨는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우연히 루게릭병 환자들의 기막힌 처지를 알게 돼 자신의 땅을 선뜻 내놓았다.

김진자씨 등이 나서 열심히 홍보 활동을 벌였지만 건립과 관리에 필요한 돈을 모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씨는 "매달 수백만원의 간병비 때문에 경제적으로 힘든 환자와 가족에게 요양소 건립 비용을 부담케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30명 정도 수용하는 단층 건물 2동을 짓는 데 2억5000만원이 필요하고 매달 들어갈 운영비는 1500만원 정도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 루게릭 고통, 기자가 체험해 보니
가려움 … 침묵 … 공포 … 15분밖에 못 견뎌

국내외 의료단체들은 '루게릭병 체험하기' 행사를 벌이곤 한다. 정상인이 중증 루게릭병 환자처럼 침상에 누워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버텨보는 것이다. 환자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껴보자는 취지다. 본지 박수련 기자도 같은 방식으로 체험해 봤다.

공기 속의 미세한 먼지에 코끝이 가려워도 손댈 수 없다. 삼키지 못하니 입술 사이로 침이 흐른다. 꼼짝 않고 5분을 버티자 호흡이 가빠진다. 몸을 뒤척이고 싶다. 그 사이 마음 속으로 참을 인(忍)자를 100번 넘게 썼다. 반복되는 천장 무늬에 머리가 어지럽다. '영원히 이대로 살아야 한다면…'.

10분이 지났다. 지금은 살아있지만 1분 뒤엔 숨이 멎어 있을지 모른다. 무기력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혹시 이런 몸이라면 가족에겐 쓸모없는 짐 아닐까. 언제라도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온다. 14분째 이어진 침묵이다. 있으나마나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다. 표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생각도 못하는 게 낫지 않을까. 머릿속에선 쉼없이 샘이 솟아오르는데 차오르는 물을 퍼낼 수 없는 처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탈출하자.

(결국 기자는 15분 만에 몸을 움직이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 탐사기획팀 = 이규연.임미진.민동기.박수련 기자, 박경훈(서강대 신방 4).백년식(광운대 법학 2)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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