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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차차 '88세 청년'] 15. 체육회 정관 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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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필자는 체육회장으로 일하는 동안 언론과 활발히 접촉해 체육회 사업의 홍보에 힘썼다. 사진은 어느 날 기자회견장에서 나오는 필자(右)의 모습.

대한체육회장에 취임하기도 전에 기자회견부터 하게 됐다.

나의 첫 마디는 간단했다. "체육인에 의한 체육인의 체육회를 재건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체육회장 직을 수락한 후 머릿속에 정리해 두었던 다섯 가지 원칙을 밝혔다.

첫째, 비민주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정관 개정. 둘째, 도쿄올림픽 대책 강구. 셋째, 조속한 체육회관 건립. 넷째, 아시아경기대회 서울 유치를 위한 종합경기장 건립 촉진. 다섯째, 사무체제의 정비 강화.

기자들의 질문은 첫째 원칙에 집중됐다. '정관 개정'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이었다. 당시는 거의 모든 조직의 권한이 중앙에 집중돼 있었다. 대한체육회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체육회 정관 53조는 31개 산하 경기단체의 장을 체육회장이 임명하도록 규정했다. 나는 각 경기단체의 임원 선출권을 구성원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러면 많은 체육인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임갑인.김치열.윤두식.유태영.서영석씨 등으로 심의위원회를 구성해 정관 개정 작업을 서두르게 했다. 각 경기단체는 회장.부회장.이사 등을 스스로 선출하되 체육회장의 인준을 받도록 하는 내용의 정관 개정안이 마련됐다.

1964년 3월 14일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체육회 총회가 열렸다. 개정안을 심의하는데 의외로 경기단체 임원의 임명제를 주장하는 대의원이 많았다. 급기야 1차 투표에서 개정안이 부결됐다. 나는 그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2차 투표에서 가결됐다. 나는 각 경기단체에 4월 5일까지 대의원 총회를 열어 새 집행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이 일로 체육계는 벌집 쑤신 듯 소란했다. 종목마다 갈등과 반목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었다. 야구는 영남과 호남, 축구는 지연과 학연에 따라 패가 갈려 분쟁이 잇따랐다.

분쟁의 성격은 대부분 주도권 다툼이었다. 여기에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이해가 엇갈린 체육인들의 손익 계산이 곁들여졌다. 국제대회에 나가는 선수단의 임원으로 끼어 보려는 욕심을 가진 인사들이 적잖았다.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편이 갈려 있었다. 내 책상에는 진정서와 연판장이 수북이 쌓였다. 심지어 국제기구에 투서까지 하는 인사도 있었다. 나는 격분했다. 국가 위신을 손상시키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진통이 가라앉는 데 넉달이나 걸렸다. 그래도 축구는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체육회장이 축구협회까지 맡게 됐다.

이 무렵 일로 기억에 남는 한 가지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독립이다. KOC는 46년 7월 체육회 안에 올림픽대책위원회를 둔 이래 체육회 내부기구처럼 인식돼왔다. 위원장도 체육회장이 겸임해왔다. 나는 KOC의 분리 독립을 주장했다. 이기붕씨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IOC위원 자리도 체육회장만이 승계할 자격이 있었으나 미련 없이 포기했다. KOC의 분리 독립과 재출범은 64년 3월 9일에 이뤄졌다. 나와 장기영.김윤기.유한철.오광섭씨 등 다섯 명이 전형위원회를 구성해 이상백 박사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KOC 독립 후 체육계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당초 내가 그렸던 이상과는 딴판이었다. 모든 제도가 안정된 궤도에 올라서려면 혼란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했다. 업무 분장을 둘러싼 마찰과 정책의 통일성 결여에 따른 혼선, 대표선수 선발 과정에서의 온갖 불협화음. 내가 기대했던 스포츠 외교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나로서는 후회 막급일 뿐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2년 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안게임에 이르러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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