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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 '눈'으로 쓰다] 2. 고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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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날간병하시는엄마/정말촛불같은엄ㅁ마의생명과체력/울엄마연세가70을바라봅니다/보통이정도나이면손자손녀와노후생활즐기실때/엄마는2미터가넘는1급중증장애를앓고있절돌보십니다(열여덟 번째 메일에서). 박종근 기자

지난해 5월 박승일(34.전 연세대.기아차 선수 및 현대모비스 코치)씨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갑자기 호흡이 어려워진 것이다. 순간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끝이구나. 많은 루게릭병 환우들이 이렇게 최후를 맞는다는데….'

부랴부랴 실려간 응급실. 전기 충격 요법이 황천길을 떠나는 그를 붙잡았다. 텅, 텅. 나무토막 같은 몸이 튀어오르길 몇 번. 그는 겨우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스스로 숨을 쉴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신세가 됐다. 호흡 근육이 마비돼 기도를 뚫고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그는 기자에게 보내온 e-메일에 이렇게 적었다.

생명과목소리를바뀠다

루게릭병 환자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다. 호흡기까지 마비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같은 환자는 호흡기능이 살아있지만, 미국 야구선수 루게릭이나 승일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승일은 항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 저승에 한 발, 이승에 한 발을 담근 채. 가장 무서운 것은 정전(停電)이다. 숨을 쉬게 해주는 인공호흡기가 꺼지면, 이번엔 진짜 죽음이 온다. 간병인이 호흡량을 잘못 조절해 숨이 넘어갈 뻔한 적도 있다.

한번잠시숨을놓은적있고난후
지금삶은덤이라고생각해요
전엔살고싶은맘만가득했는데

사지가 마비된 승일은 눈꺼풀이나 눈빛으로 가족들에게 감정을 표시한다. 하지만 눈 주변 근육마저 힘을 잃어가면서 감정 표현도 점점 어려워진다.

난눈으로
짜증
답답함
불편

기쁨
슬픔
등을 표현한다
그중에서제일많이표현하는건
애원과답답함이다

몸이 무뎌질수록 감각과 신경은 더 예민해져 간다. 그는 자신의 인터넷 팬카페에 올린 글에서 '루게릭환우들의마음은샤프심'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작은 실수도 생명과 직결된 상황. 어머니 손복순(64)씨가 잘못해 호흡기나 침대를 건드릴 때면 승일은 눈을 치켜뜬다. 항의의 표시다. 아들 수발에 삶을 저당 잡힌 어머니는, 작은 실수에도 눈을 부릅뜨는 아들이 야속하다. 아무리 정성껏 돌봐도, 손톱만큼도 호전되지 않는 이 죽일 놈의 병도 서럽다. 투병 생활 3년 반. 어머니는 "같이 죽고 싶을 때도 있다"며 숨죽여 울먹였다.

몇 년 전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루게릭병 환자인 모리 교수는 이 병을 '촛불'에 비유했다. 몸이 서서히 녹아내려 가는…. 하지만 승일은 '물귀신'이라고 표현한다.

촛불은자신을희생하여주위를밝게비추워도움을주지만
루게릭환자는결코누구를도울수없고
오히려가족을피말려같이죽음까지부러들이는
물귀신이라고표현할까요

루게릭병 환자가 있는 집안의 십중팔구는 몇 년 내 무너진다. 가족들이 24시간 간병해야 하는 데다 고가의 연명 장비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희귀병 중 희귀병이기 때문에 정부는 거의 손을 놓고 있다. 자원봉사자나 병원에서도 간병하기 어려운 루게릭병 환자를 기피한다. 소외 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승일이 소속된 한국ALS(루게릭병)협회 부회장인 김진자(64.여)씨는 루게릭병을 앓는 남편을 보살펴 온 지 12년째다. "베개 올려요? 가래 끓어요? 어깨 긁어요? 등 긁어요?" "…" 남편이 '그렇다'는 뜻으로 눈을 깜박이자, 김씨가 등을 긁어준다. 그의 삶은 중노동의 연속이다. 20분에 한 번씩 남편 목에서 가래를 빼내고, 욕창을 막기 위해 수시로 자세를 바꿔준다. 대변은 손으로 빼내고 소변은 비닐팩으로 받아낸다. 새벽 3시에 기구를 소독한 다음, 혹시라도 가래가 기도를 막을까봐 선잠을 잔다. 모아둔 돈이 바닥 나 연이율 15%의 사채를 끌어 생활한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한 달 간병비는 고작 15만원이에요. 얼마 전 보건복지부에 항의를 했더니 '그것도 감지덕지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땐 때려주고 싶었어요."

2002년 11월 초 승일은 어렵게 수화기를 들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잠시 귀국해 있던 박찬호 선수는 마침 전화를 받았다. 박 선수는 "루게릭병 환자들을 도와달라"는 느리고 어눌한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한 달 뒤엔 승일의 집을 방문했다. 지난해엔 "1승마다 100만원씩 루게릭 요양소 건립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승일은 2002년 6월 확정 진단을 받은 뒤부터 루게릭병 홍보에 매달렸다. 가족들은 "네 몸이나 챙기라"며 말렸다. 하지만 기회만 되면 언론.인터넷을 통해 도움을 호소했다.

무언가를하지않고마냥죽음만기다렷다면자살충동을이기지못했을거다
가끔일(홍보)에미쳐잇을때도아파트베란다난간에서망설린적이한두번이아니엇고

승일은 한때 미국으로 떠나 버리려 했다. 루게릭병 환자를 위해 거의 아무것도 갖춰놓지 않은 우리 사회. 국내에서 계속 요양하다가는 집안이 다 망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15년 지기인 미국인 친구 김미남(36)씨가 미국 요양시설을 알아봐 줬다. 하지만 가족들이 반대했다. 지금까지는 부모와 두 누나의 도움을 받으며 근근이 투병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보낸 메일에서 정부에 서운함을 표시했다.

건강히직장다닐땐국민의무를운운하며그비싼세금겉어갈땐언제며
정부에정말절실하게도움이필료할시기에
날외면하고있다는사실

※박승일씨는 '안구 마우스'(눈의 깜박임을 문자로 인식하는 장비)의 도움을 받아 e-메일을 썼습니다. 작동하는 데 엄청난 힘이 들어 띄어쓰기를 하지 못하고 군데군데 철자가 틀리기도 했습니다. 작성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가급적 그대로 실었습니다.

■ 루게릭병 세 가족 이야기

# 두 개의 병상

12년째 루게릭병과 싸워온 이정희(56.여)씨의 반지하 전셋집에는 두 개의 병상이 있다.

하나는 이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남편(72) 것이다.

올 2월 이씨는 자신이 루게릭병에 걸렸을 때보다 더 큰 절망을 경험했다. 간병을 도맡았던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부부는 방과 거실마루에 나란히 누워있다.

대학생인 아들과 직장에 다니는 딸이 간병을 맡고 있다.

'환자는 환자대로 보호받고 가족 또한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요양소가 필요합니다.'

이씨가 최근 한국ALS 협회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사지가 마비됐지만 다행히 호흡기가 정상인 그는 딸에게 자신의 주장을 불러줘 세상과 만난다.

# 디엔드(THE END.끝)

정선근(41)씨는 촉망받는 작곡가였다. 2002년 8월 병마가 그의 몸을 침범했다. 그의 인생은 '촉망'에서 '절망'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발병 이후 이혼 문제로 부인과 다투다가 얼마 전 완전히 갈라섰다. 그는 소외감과 무관심의 암흑 속에 가끔 혼자 흐느낀다. 하지만 어린 딸(4)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주저앉을 수 없었다. 음악 레슨을 시작했지만 굳어가는 몸으로는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그에게 남은 즐거움은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몸이 마비돼 그것밖에 할 수 없지만) 컴퓨터로 자신이 예전에 작곡한 음악을 듣는 것과 조금씩 작곡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99년 지은 '디엔드'라는 곡을 자주 듣는다. 그는 "한계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그 시절, 그때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만들었는지…"하고 말을 흐렸다.

# 손가락 하나

"가족이 없었다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냈을 겁니다."

루게릭병에 걸린 지 7년. 지금 이원규(45)씨가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은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하나. 지난해 9월 그는 성균관대 국문학 박사가 됐다. 처음 논문을 시작한 4년 전에는 루게릭병이 자신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해 컴퓨터 자판을 정상적으로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손가락이 마비돼 논문을 마무리할 때는 컴퓨터 화면의 화상키보드 자판을 마우스로 찍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위해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고교 교사였던 그는 "대학 강단에 서고 싶다. 문학을 계속 연구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93년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그는 현재 투병 생활에 관한 에세이집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에세이집 서문에 "내가 '희망'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아내와 두 아들의 '환한 미소'때문이다"라고 썼다.

탐사기획팀=이규연.임미진.민동기.박수련 기자, 박경훈(서강대 신방 4).백년식(광운대 법학 2) 인턴기자

<letter@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 바로잡습니다

11월 10일자 5면 '루게릭 눈으로 쓰다②' 기사 중 한국루게릭병협회 부회장 김진자씨가 루게릭병 환자의 한 달 간병비가 고작 15만원인 데 대해 항의한 곳은 보건소가 아니라 보건복지부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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