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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진보, 탈출구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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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념구도라는 게 마치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아서 고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간의 거듭된 정권교체 역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어떤 상황에서는 '성공의 위기'라 할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영국 보수당 대처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도입해 위기에 빠진 영국 경제를 회생시켰지만, 바로 그 성공 안에서 싹튼 사회적 양극화는 노동당 블레어 정부를 탄생시킨 조건의 하나였다.

현재 한국의 진보 세력이 갖는 어려움은 바로 이런 '성공의 위기'와 유사하다. 민주화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이를 확산하고 심화시키는 데 한계에 직면해 있다. 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진보가 상대적 우위를 이뤄 왔다면, 그것은 개혁 의제들의 선점과 비타협적 도덕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보적 의제들은 최근 세계화의 물결이라는 도전에 대면해 왔으며, 도덕성 또한 점차 소진돼 왔다. 스스로 부단히 갱신하지 않으면 어떤 담론도 정치적 우위 내지 프리미엄을 계속 유지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이념적 세계와 탈이념적 세계가 공존해 있다는 점이다. 탈이념적 영역의 확산은 진보진영의 의제 설정에 작지 않은 어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갈수록 비중을 높여가는 외국자본에 대해 어떤 정책으로 대처할 것인가. 중국 먹거리들이 이미 우리 밥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자유무역협정(FTA)은 어떻게 풀 것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청년실업, 양심적 병역 거부, 이혼율 증가 등 전통적인 진보의 이념으로 대응하기가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 속속 등장해 왔다.

이런 이슈들에 대해 물론 진보 진영이 자신의 '입장'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입장을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이를 통해 국민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진보에 대한 지지가 하강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정책대안 제시와 국민의 설득에서 갖는 어려움에 있다. 진보에 대한 지지 그룹을 포함해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것은 입장과 담론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고 피부로 느껴지는 정책 프로그램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추진력일 것이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탈이념적 성향의 증가다. 진보에 대한 지지는 대체로 젊은 세대, 화이트칼라 및 노동자계급에서 높은 편인데, 최근 젊은 세대의 탈이념적 성향이 두드러진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의 절반이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중도라고 응답했다. 이런 중도의 증가는 진보에 대한 무관심 내지 실망을 반영하는 동시에 기존의 이념 구도에서 벗어나려는 탈이념적 성향을 보여준다.

세계화가 강화되고 이념과 탈이념이 공존하는 오늘날의 전지구적 구조 변동은 진보와 보수 모두를 새로운 시험대 위에 세워두고 있다. 세계화는 한편에서 시장의 원리를 특권화하지만, 다른 한편 사회적 양극화를 확산시킨다. 그리고 탈이념 영역의 확장은 개인과 집단, 자율과 형평,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정치적 독해와 전략을 요구한다.

바로 이 점에서 진보는 네거티브보다는 포지티브 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시장원리의 효율성을 승인하되 공정성을 더하고, 사회적 양극화 해소를 추진하되 신중산층 육성으로 나아가며, 과거사를 엄정히 결산하되 그 시야는 미래에 맞춰야 한다. 배제보다 통합을, 순수성의 고수보다는 이질성의 포용을 중시하는 전략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에 우리 진보의 성패가 달려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