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아테러거점 상실|네윈-김일성 상호방문하며 친교|각종 사절 40차례 왕래…공장건설등선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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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버마정부의 강경한「단교」조치로 북괴는 가장 중요한 동남아거점의 하나를 잃고만 결과가 됐다.
버마와 북괴는 지난 30여년간「밀월관계」를 유지해왔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북괴는 버마가 1948년 영국통치로부터 독립해 비동맹중립노선을 내걸자 50년대 중반부터 무역사절단이나 문화사절단등을 40여차례나 보내 갖은 추파를 던져왔다.
북괴가 버마를 중시한 것은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한 텅스텐등 광물자원을 수입할수 있는데다 같은 폐쇄사회라는 공통점을 이용, 버마를 동남아 테러활동의 거점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북괴는 특히「네·윈」체제에 대한 서방측의 비판이 고조된 70년대 중반이후 버마와의 인사교류및 경제원조를 강화해왔다.
김일성(65년)과「네·윈」(77년)이 상호 방문한 일도 있으며 북괴는 71년 이앙기4대, 78년 불도저 2대및 트랙터 5대를 무상원조하고 77년에는 농업기술지도원 3명을 파견하기도 했다.
또 최근 버마ㆍ한국간의 경제협력관계가 긴밀해지자 북괴는 스스로가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음에도 북구하고 랭군근교 시리암에 5백만달러(40억원)를 투입, 동독제주석용광로를 설치해 주었으며 3백61만5천달러(30억원)의 차관도 제공했다.
이런 관계로 남북한이 75년 같은해에 버마와 외교관계를 맺었으면서도 그동안 북괴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수 있었다.
그러나 북괴는 버마와의 경제협력관계를 가장, 실질적으로는 버마를 동남아에서의 활동거점으로 삼고있었음이 이번 아웅산암살폭발사건을 비롯한 여러 증거로 드러나고있다.
북괴는 버마로부터 78년2백10만달러, 79년 3백10만달러, 80년 4백40만달러어치를 수입하고 버마에 10만달러미만의 상품을 수출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버마와 한국과의 무역거래액이 2천5백만달러(82년)에 이르는 점을 생각하면 보잘것없는 규모인 셈이다. 북괴는 주로 버마산 쌀·티크재·광물등을 수입해왔다.
특히 북괴는 버마중부지방에 도자기및 가정용 유리그릇공장을 건설하겠다고해놓고는 지난9월 이공장건설에 필요한 첫번째 자재를 싣고 랭군항에 입항한 북괴화물선 동건애국호(5천2백t)를 이용, 아웅산폭발사건을 위한 테러분자들을 잠입시킨것으로 알려져 경제협력의 가면을쓴 그들의 흉계를 다시한번 폭로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TV방송이보도한 바에 따르면 북괴는 특수부대요원을 버마에 파견, 반정부활동을 벌이고 있는 소수민족과 공산게릴라들을 극비리에 지원하고있다는 설도 나돌아 북괴의 폭력혁명수출이 버마에서도 진행되고 있음을 추측케 했다.
80년대들어「네·윈」대통령이 정치2선으로 물러나는것과 때를 같이해 버마사회가 제한적이나마 개방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대한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자 북괴는 지난8월하순 인민회의상임위원장 양형섭을 단장으로한 사절단을 파견, 일련의 대한견제공세를 펴기도 했다.
버마의 대한접근에 북괴가 손을 쓸수 없었던 것은 한국의 경제외교를 저지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
한국은 버마건국이래의 최대사업인 킨다댐건설공사(충주댐규모·8천만달러)를 81년 현대건설이 수주해 현재 60%정도의 공정을 보이고 있는것을 비롯, 82년에는 국제상사가 냉동설비플랜트를 수주하는등 실질관계를 착실히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결과적으로 북괴는·버마정부의 단교조치로 이미 대한선회경향을 보인 인도·스리랑카와함께 가강 중요한 동남아거점이었던 버마마저 잃어버리게 됐다.
현재 버마에는 북괴대사관직원및 기술자·가족등 20여명이 체류하고 있는것으로 알러졌으나 6일중으로 모두 출국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다. <이재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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