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지원하며 개방 요구 통일에 공짜는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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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89년 11월 9일. 동.서 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장벽 붕괴 16돌을 맞아 서독의 마지막 동독주재 상주대표부 대사를 지낸 프란츠 베르텔레(74) 박사를 만났다. 그는 동독 정권 말기 동베를린에서 활동했던 서독의 최일선 외교 사령탑으로 동.서독 정부의 막후협상을 도맡았다. 서독 정부가 동독 망명자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또 분단 상황 극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물었다.

"통일은 갑자기 찾아온다. 89년 1월 대사로 발령이 나 동독으로 부임하기 직전 인터뷰에서 '내 임기 중 획기적인 변화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불과 10개월 만에 통일이 이뤄졌다. 동독을 탈출하려는 주민들이 어느 순간 밀물처럼 밀려왔다. 국제정세의 흐름이 그토록 빠른 변화를 초래할 줄은 정말 몰랐다."

베르텔레 박사는 지금도 실감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서독 외교부의 동독 전문가이자 최일선 현장 외교관인 그도 동독 주민들이 몰려올 때까지 통일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를 유대인들의 엑소더스(대탈출)에 비유했다. 그해 8월 어느 날 동베를린에 있던 서독대표부에 131명의 동독인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미군이 헬리콥터로 자신들을 서독으로 옮겨줄 것을 희망했다. 국제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일단 대사는 동독이 이들을 강제 연행하지 못하도록 협상을 시작했다. 얘기가 잘 풀렸다. 동독 당국자들이 이미 큰 흐름을 인식하고 있었다. 협상 끝에 131명은 서독으로 갈 수 있었다. 사실상 베를린 장벽은 이때 이미 무너졌다. 폴란드와 체코 등 인근국 서독대사관에도 동독인들이 밀려들었다.

베르텔레 전 대사는 아들 요아힘이 주한 독일대사관에 근무했기 때문인지 최근의 한반도 사정에도 밝았다. 그가 보는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상황은 전혀 다르다. "독일은 한국처럼 철저하게 분단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들어선 61년 이후 87년까지 550만 명의 서독인이 동독을 여행했고 5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을 방문했다. 제한적이지만 동독인도 허가를 받고 정식으로 서독을 여행할 수 있었다. 허가를 받지 못한 동독인 중 일부가 베를린 장벽을 타 넘다가 경비병의 총탄에 희생됐다. 88년 서독에서 동독으로 간 편지가 8000만 통 반대로 동독에서 서독으로 배달된 편지는 9500만 통이다.

이산가족의 생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반도와는 전혀 달랐다.

베르텔레 박사는 "이 모든 과정에서 공짜는 하나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서독 정부는 동독에 경제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동.서독 주민의 상호 방문과 교류 확대를 끊임없이 주장하고 관철했다"는 것이다. 동독은 체제 위협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서독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서독의 지원 없이 버티기 힘들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동독이 타협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고, 서독은 이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충분히 활용했다는 설명이다.

박사는 최근 활기를 보이는 남북한 경제 교류를 언급하며 "동.서독의 사례가 한국인에게 참고할 만한 모델"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독의 막대한 경제 지원이 동독 정권의 수명을 연장하는 부작용(?)을 빚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서독 지도자들의 인도주의적 지원 원칙은 확고했다. "서독 정부가 가장 우선시했던 점은 분단으로 인한 독일인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었다.

89년 가을 대규모 시위를 벌이던 동독 시위대는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며 서독과의 통일을 요구했다. 동독인이 더 크게 통일을 외쳤다. 베르텔레 박사는 "동독 주민들은 서독 정부가 항상 자신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 지원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독 정부의 일관된 노력이 수십 년간 이어지자 어느 순간 동독 주민 스스로 통일의 필요성을 더 절감케 됐다는 설명이다.

◆ 동.서독 상주대표부=동.서독 관계의 발전을 위해 1974년 동베를린(동독 수도)과 본(서독 수도)에 개설됐다. 국교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대사관과 같은 구실을 한 특수 외교 공관이다. 두 대표부의 정치적인 비중은 매우 달랐다. 본에 주재했던 동독 대표부는 존재 자체에 의미를 두었지만 동베를린 주재 서독 대표부는 양독 관계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동.서독이 상대 대표부에 부여한 지위도 다르다. 동독은 서독 대표부를 외국 대사관으로 간주해 외교부가 관할했다. 반면 서독은 동독을 외국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서독은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동독 문제를 국내 사안으로 다루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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