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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1>제80화 한일회담(50)유진오-한일합방 조약 무효 확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우리가 한일합방 조약의 무효 확인을 기본 조약에 굳이 명문화하려는 것은 보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국민적 자존심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합방」이라는 민족적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이제 양국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마당에서 문서상으로나마 그러한 치욕의 역사를 씻어 버려야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 기본 조약 3조는 이 대통령의 강력한 지시에 의해 당시 김동조 외무부 정무국장과 김영조씨 등이 중심이 돼서 각국의 비슷한 선례를 검토한 뒤 성안한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이 조항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측은 대뜸 이의를 재기해 왔다.
『이 조항이 없다고 해서 한일합방 조약이 지금도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은 한사람도 없다. 다만 이 조항을 굳이 넣음으로 해서 일본 국민의 심리에 불필요한 자극을 줄 염려가 있다. 따라서 기본 조약 3조는 우리로서는 반대이며 삭제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일본측의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기본 조약 3조가 있음으로 해서 일본측은 패전의 쓰라린 기억을 되살리게 될 것이므로 그런 조항은 없애고 싶다는 뜻이었다.
한일합방에 의해 엄청난 국가적 피해와 민족적 수모를 겪은 우리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의 아픈 상처만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이기적 동기의 발로였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한일 양국의 과거사에 대한 그들의 뻔뻔하고 일방적인 인식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때문에 우리는 일본의 삭제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기본 조약 3조가 일본 국민 감정을 자극한다는 얘기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 일본은 아직도 제국주의적 발상과 그에 따른 과오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일본은 모름지기 「한일합방 조약의 무효 확인」을 흔연히 수락하고 차제에 대오 각성하여 진정한 민주 일본의 재출발을 선언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일본측은 쓰다 달다는 말 한마디 없이 침묵을 지켰다.
우리는 계속해서 기본 조약 3조에 관한 우리측 입장을 명백하게 밝혔다. 『향후 한일 관계를 규정할 기본조약에 「한일합방 조약의 무효 확인」을 명문화하려는 것은 전체 한민족의 민족 감정에서 우러난 움직일 수 없는 기본 노선이다.』
우리가 이렇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일본측은 지금까지의 「국민 감정 운운」하면서 3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고집해 오지는 않았다.
다만 일본은 l910년 당시부터 무효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장래에 있어서의 무효, 즉 「국교 정상화 이후부터 무효」라고 규정한다면 이는 고려하겠다는 일종 수정 제안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수정 제안을 우리측은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우리의 입장은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합병 조약은 일본의 침략적 불법행위의 소산이기 때문에 시초부터 무효임을 확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거듭 주장했다.
우리가 제시한 「한일합병 조약의 무효 확인」 문제는 그 후에도 계속 기본 조약 교섭의 주 논쟁점으로 등장해 양측간에 평행선을 달리는 설전이 계속되었다.
일본이 1차 회담에서 이 문제에 관해 최종적으로 제시한 대안은 「일본과 대한민국과의 관계에 있어 한일합병 조약이 효력을 갖지 않음을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대한민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독립 후의 한국에 대해 합방 조약이 효력을 상실했음을 확인한다는 뜻이었다.
이 문제는 우리측의 일관된 주장으로 타협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나머지 문제들은 모두 여덟 차례의 회담을 진행하면서 별다른 이견이 없어 대체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본 조약의 핵심인 「한일합병 조약의 시초부터 무효」라는 우리의 주장이 일본에 의해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상 전체의 합의를 이룰 수는 없었고 결국 양측은 합의를 유보한 채 이 문제 역시 2차 회담으로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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