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무의식이 미숙한 성공한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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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형경
소설가

그는 성장기에 부모의 큰 기대를 받은 인물이다. 성인이 된 후의 삶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는 부모를 만날 때마다 장밋빛 청사진을 들고 갔다. 언젠가는, 아마도 곧 부모가 원하는 찬란한 성공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아들의 총명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부모는 그 말을 믿었고, 아들 역시 자기가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들의 사업 자금을 대던 부모가 빈털터리가 되는 20년 동안.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이 표출되는 통로를 꿈, 몸의 통증, 언어 세 가지라 말한다. 그 학문이 연구되던 초기에는 무의식에 접근하기 위해 언어 연상 실험을 했다. 특정 단어를 들려주고 연상되는 어휘를 말하는 방식이다. 피실험자가 특정 단어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감정적 반응을 할 때 무의식이 작동되는 증거라 여겼다. 요즈음은 일상에서 범하는 말실수를 무의식이 표현되는 대표적인 현상으로 본다. ‘입술 위에서 미끄러지는 무의식’이라 한다.

 여자들이 수다·잔소리 등 언어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자는 말로써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남자에게 언어는 오히려 경쟁과 전략의 도구다. 상대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유혹의 말,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협박의 말, 자신을 부풀려 보이기 위한 과장의 말 등을 주로 한다. 그것은 감정적 진실과 무관하다. 경쟁 현장에서 감정·진실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뿐이다. 그리하여 세속의 법칙으로 성공한 남자들을 보면 의식 차원에서 능숙한 만큼 무의식 차원에서 미숙하다. 그들이 억눌러온 무의식 영역이 통제력을 잃고 터져 나올 때마다 그것을 확인한다.

 무의식이 터져 나오는 대표적인 경우는 술에 취해 자제력을 잃었을 때다. 평소라면 입 다물고 안으로 삼켰을 말들이 제멋대로 ‘입술 위에서 미끄러진다’. 무의식이 통제되지 않는 또 다른 경우는 도취의 순간이다. 여자든 권력이든 그것에 도취되는 순간의 황홀감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도취감에 취한 상태에서 범한 말실수는 가끔 이성을 잃은 듯 보이고, 결국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는 결과로 이어진다. 성공 뒤에 온다는 슬럼프 역시 도취감 때문에 풀려나온 무의식이 당사자를 삼킨 결과가 아닐까 싶다.

 억압된 무의식은 힘이 세다. 일순간, 혹은 점진적으로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아들이 부모에게 내밀었던 청사진은 인정받고 싶은 무의식이 만든 거짓말이었다. 그 말을 믿은 부모는 아들이 빛났던 시절의 무의식에 현실감 없이 고착되어 있었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