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100일] 불법도청 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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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검찰은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를 정점으로 역대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인 수사검사 14명과 수사관 50여 명을 투입, 국가 정보기관의 불법 도청 실태를 밝혀냈다. 검찰은 이날 신건 전 국정원장과 함께 근무한 이수일 전 차장을 소환조사했으며, 조만간 신 전 원장을 불러 조사한 뒤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 드러난 불법 도청 실체=검찰의 최대 성과는 소문과 의혹으로만 떠돌던 국가 기관의 불법 도청 실체를 밝혀낸 것이다. 두 차례의 압수수색이 결정적 계기였다. 검찰은 7월 27일 안기부 비밀 도청조직인 미림팀장 공운영(구속기소)씨 집에서 274개의 불법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을 압수했다. 안기부 시절 불법 도청의 결정적 증거가 나오자 국정원은 8월 5일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 국정원 시절의 불법 도청 사실까지 '고백'했다.

검찰은 8월 19일 국정원에 대해 사상 초유의 압수수색을 했다. 국정원이 관련 자료를 정리하는 등 사전에 압수수색에 대비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가 없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CAS)의 사용 신청 목록을 압수, 휴대전화도 도청됐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이어 국정원 고위 인사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됐다. 공씨로부터 테이프를 반납 받아 폐기한 이건모 전 국정원 감찰실장과 당시 국정원장이던 천용택씨를 시작으로 오정소.황창평.박일룡 전 안기부 차장이 검찰에 불려왔다. 미림팀 도청정보를 보고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 김기섭 전 안기부 기조실장도 조사를 받았다.

◆ 도청 지시.보고 라인 확인=검찰은 국정원 전.현직 실무 직원들도 조사했다. 불법 도청이 상부의 지시에 따라 조직적으로 이뤄졌을 개연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수사 초기 직원들은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검찰 조사에 협조한 국정원 직원을 동료들이 집단따돌림하거나, 검찰 출두에 앞서 직원들끼리 입을 맞추며 수사를 방해했다. 김승규 국정원장은 "검찰에 사실대로 진술해도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검찰은 직원들에 대한 조사에서 유선 중계통신망 감청장비(R-2)를 이용한 불법 도청의 과정과 사례를 확인했다. 이와 함께 불법 도청의 지시와 보고에 관여한 국정원 고위 인사의 신원이 직원들의 진술을 통해 드러났다. 검찰은 지난달 6일 김은성(구속기소) 전 국정원 차장을 긴급체포,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최규선 게이트' 등 권력형 비리 사건의 당사자에서 정치인들의 통화 내용까지 불법 도청을 자행했다는 사실이 공소장을 통해 확인됐다.

검찰은 김씨의 공소장에서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을 불법 도청 공모범으로 지목했다. 불법 도청을 지시하고 보고받았다는 뜻이다.

◆ 도청 테이프 처리 관심=검찰은 앞으로 도청 정보의 외부 유출 과정을 수사할 계획이다. 유출 자료가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확인되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2002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이 공개한 도청 문건과 김은성씨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 줬다는 보고서 등의 도청 자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외부로 유출됐는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검찰이 압수한 테이프의 처리 문제도 관심거리다. 불법으로 취득한 단서는 수사에 활용할 수 없다는 '독수(毒樹)의 과실' 논리에 따라 내용 수사는 할 수 없다는 게 검찰의 확고한 입장이다. 그러나 국정원이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무슨 내용을 도청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테이프의 목록을 작성 중이다. 도청 대상에는 정치인뿐 아니라 언론인.기업인.고위 공무원 등 사회 주요 인사가 망라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목록이 공개될 경우 또 다른 파장이 예상된다. 검찰은 이달 말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장혜수.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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