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 돌고 돌아 '맛있는 인생' 찾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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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나이 들어 군에 입대한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김씨는 뒤늦게 조리사의 길로 접어든 때문에 자신보다 네댓 살 어린 '주방 선배'들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써야 하는 처지다. 게다가 관광 명소의 식당이라는 특성상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고향(강원도 정선)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는 "가끔 어려움도 있지만 일이 즐겁기에 조리사가 된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 세대의 여느 젊은이들처럼 안정된 직장이나 월급이 많은 직장을 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에게 맞는, 즐기며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대학 시절 김씨의 꿈은 연극 연출가였다. 그러나 그는 93년 대학을 졸업한 뒤 첫 직업으로 학원 강사를 택했다. 연극 분야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등록금도 마련하려고 택한 임시직이었다. 1년 남짓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대학원 입시에 낙방하면서 어느 순간에 연극 이론을 공부하기가 싫어졌다. "연극 연출을 직업으로 삼을 인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기로 했죠."

제대로 된 직장을 찾자며 두드린 것이 해외여행 가이드. 그는 "유전자에 '역마살'이란 단어가 새겨져 있지 않나 여길 정도로 어릴 때부터 여행을 좋아했다"고 했다. 95년부터 2년 동안 캐나다.뉴질랜드 등 전세계 40여 개국을 '신나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 직업에서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고객을 이끌고 값이 비싼 물건을 파는, 별로 좋지 않은 쇼핑센터에도 들러야 하고…. 명색이 '서비스업'인데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직업도 제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던 차에 외환 위기가 닥쳤다. 달러 환율이 폭등하면서 해외여행객이 뚝 끊겼고, 김씨가 몸담았던 대형 여행사는 문을 닫았다. 백수로 전전하던 차에 출판.인쇄 기획사를 운영하던 대학 선배가 함께 일을 하자고 불렀다. 그러나 대학교와 백화점 등을 돌며 교지.광고물 인쇄를 맡아오는 일이 즐겁지 않았다.

자나깨나 '나에게 맞는 일이 무얼까'를 생각했다. '조리사'라는 직업이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찌개를 끓이려고 양파나 감자를 써는 동안에는 요리에만 열중하는 자신을 문득 발견했던 것이다. "대학 시절 카페 주방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군에서 소대 취사병으로 일하면서 요리를 할 때 괜히 기분이 좋았던 기억들이 하나 둘 되살아나더군요. 여기에 제 인생의 '예정된 길'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모 대학의 사회교육원에서 조리사 취업 강좌를 듣기 시작했다. 6개월 과정 마지막 달에는 63빌딩에 실습을 나갔다. 그게 인연이 돼 98년 말부터 63빌딩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조리사로 일하게 됐다. 1년 반의 아르바이트와 2년의 계약직 기간을 거쳐 2002년 정식 직원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직장을 구한 친구들에 비하면 10년 가까이 늦었다. 김씨는 "좋아하는 일을 찾아 인생을 약간 돌아왔을 뿐 삶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조리사가 김씨 직업 열차의 종착역일까. 그는 아니라고 했다. 김씨의 꿈은 자신의 식당을 차리는 것이다. 김씨는 "요리사라는 천직에 자유를 더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자신이 가장 잘 요리할 수 있는 메뉴 한두 개만 전문으로 서비스하는 식당을 차리겠다는 것이다. "제가 다녔던 여행사는 한 해 해외관광객이 10만 명에 이를 정도의 큰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외환위기 때 모래성처럼 하루아침에 무너졌죠. 그때 느낀 게 무슨 일을 하든지 무작정 크게 벌일 것이 아니라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지만 강한 식당. 그게 제 꿈입니다."

글=권혁주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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