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 아시아] 일본사회 '익명의 덫'에 걸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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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협받는 언론의 감시 기능=나가노(長野)현은 과장 이상 퇴직 공무원이 재취업할 경우 본인의 동의 없이는 신분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 결과 언론이 낙하산 인사를 감시할 길이 봉쇄됐다.

정부는 사건.사고 피해자의 이름을 실명 처리할 것인지를 경찰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국민의 알 권리와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문제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안마다 실명 공개의 타당성을 따져야 한다는 것이 이유다. 그 결과 경찰은 사건.사고의 절반 이상을 익명으로 처리하고 있다. 누가 사고를 당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일본 변호사협회와 신문협회 등은 정확하고 객관적인 보도와 정부의 정보 조작 가능성을 감시하기 위해선 실명으로 발표해야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 무너지는 사회연대=지진 등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에선 지역 자치회가 발달해 있다. 혼자 사는 노인이나 장애인은 자치회가 지자체로부터 명단을 받아 신원을 파악해 왔다. 그러나 개인정보 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지바(千葉)시 등 몇몇 지자체는 명단 제공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1만여 명이 사는 지바시 임대주택단지의 자치회는 "혼자 사는 노인 600여 명의 절반 이상은 신원을 모른다"며 "그들이 사망해도 알 길이 없다"고 걱정하고 있다.

◆ 위협받는 공권력=일본 경찰은 "법에 따라 수사 협조 요청을 해도 병원이 입원 여부를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4~6월 석 달 동안만 500건 정도 있었다"고 하소연했다. 어떤 소방서는 피해자가 응급전화(119)를 건 시간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 삭막해진 학교=릿쿄(立敎)대 게시판에는 학생 이름 대신 학생 번호가 등장했다. 도카이(東海)대는 고교 은사가 제자의 연락처를 문의해도 알려주지 않는다. 쓰쿠바(筑波)대 대학신문은 매년 4월 신입생의 이름과 출신교를 싣던 것을 올해부터 중단했다.

지바현의 노다(野田) 시립중은 홈페이지에 실린 학생 얼굴의 눈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야마구치(山口) 현립고는 학생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비상연락망을 폐지했다. 대신 급한 연락사항이 있으면 학생들이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도록 했다. 교사의 집주소와 연락처도 학생들에겐 비밀로 돼 있다. 교사가 학교 밖에 있으면 연락할 방법이 없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학생들은 휴대전화로 교감을 찾아야 한다.

오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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