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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봉황이 구름과 노닐듯 오묘 … 스물넷 추사, 차 사랑 시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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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호 26면

추사 김정희의 차에 대한 깊이가 더해진 건 제주 유배 시절이다. 척박한 유배지는 견디기 쉬운 환경이 아니었기에 울분을 차로 달랬다. 그림은 제주 유배 시절 남긴 걸작 ‘세한도’.

조선 후기 문예를 이끈 추사 김정희(1786~ 1856)는 음다(飮茶)의 즐거움을 체득했던 인물이다. 대흥사 승려 초의(草衣·1786~1866)와 함께 민멸 위기에 놓인 조선의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권문세가의 후예였던 그는 세상을 이롭게 할 보배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어린 시절 집 앞에 써 붙인 입춘방(立春榜)에 은근히 드러났으니 이를 눈치 챈 것은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이 어린 추사에 대해 “글씨로써 대성하겠으나 그 길로 가면 인생행로가 몹시 험할 것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오”라고 한 예견은 천재성을 지닌 이의 명암을 아울러 말한 명언이었다. 결과적으로 추사는 추사체를 이뤘지만 그의 인생행로는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20> 추사 김정희와 차

그가 박제가(朴齊家·1750~1805)와 사제의 의를 맺은 것은 시대적 흐름이었다. 북학에 대한 관심은 시대의 흐름을 파악했던 그다운 선택이 아니었을까.

허련의 추사 초상화. 그는 추사와 초의를 이어줬다.

추사 생애 두 번째 행운은 연경에서였다.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친을 따라 연행을 갔다가 그 이듬해 이임송의 소개로 당대 석학인 담계 옹방강(覃溪 翁方綱·1733~1818)을 만났으며 다시 운대 완원(雲臺 阮元·1764~1849)을 만난다. 이들은 추사에게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 대스승이었다. 흠모와 존경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사제의(師弟義)는 길이 칭송될 통유(通儒)의 아름다움이라 하겠다. 이런 인연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청나라의 이름 높은 문사들의 저술을 두루 읽었던 추사였기에 이미 오래전부터 두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마음에 품었으리라. 그러기에 그의 열망은 두 스승을 지근에서 모시게 된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젊은 패기와 영민함을 두루 갖춘 추사도 이들의 환대를 받았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했던 이들의 만남은 오직 성의와 학문적 심문(審問)만으로 서로를 깊이 이해했다. 속 깊은 대유(大儒)의 교유는 이처럼 진실하다. 담계는 자신의 서재 석묵서루(石墨書樓)를 추사에게 공개해 그가 소장한 진기한 서적들을 아낌없이 일람(一覽)하게 했다. 이뿐 아니라 추사를 “학문과 문장이 해동 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 칭송했다. 그가 차의 오묘한 세계에 매료된 것도 이 무렵이다. 행운은 이처럼 한꺼번에 찾아오는 빛인가 보다. 운대는 태화쌍비관으로 추사를 초청해 천하의 명차 용봉승설(龍鳳勝雪)을 대접한다. 이때 느낀 감동은 추사의 차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호를 승설도인(勝雪道人)이라 한 것에서도 짐작된다. 후일 쌍계사 육조탑의 만허(晩虛)가 만든 차를 맛본 후 40여 년 전 경험했던 용봉승설의 여운을 회상한 사실은 권돈인(權敦仁·1783~1859)에게 보낸 편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품은 과연 승설의 향기로운 여향이 쌍비관에서 맛본 것처럼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차를 조선으로 온 지 40년이 지났지만 다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영남 사람이 지리산 산승에게 얻은 것인데 산승 또한 개미같이 어린 차 싹을 금탑에서 모아 만든다 하니 실제로 많이 얻기는 어려울 겁니다. 또 내년 봄에 다시 차를 청한다 해도 산승은 모두 깊이 감출 것이니 (이는) 차세를 내라는 관리가 두려워 쉽게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남 사람과 산승이 좋아하고 숭상하니 (차를 구하는 일을) 도모해볼 만합니다. 그 사람이 내 글씨를 매우 좋아하니 이리저리 하면 서로 기쁘게 바꾼다고 말한 겁니다(茶品果是勝雪之餘馥賸香 曾於雙碑館中見 如此者 東來四十年 再未見之 嶺南人得之於智異山山僧 山僧亦如蟻聚金塔 實難多得 又要明春再乞 僧 皆深秘 畏官不易 然 其人與僧好尙 可圖之 其人深愛拙書 有轉轉兑換之道耳)”
‘여권이재돈인(與權彛齋敦仁)’ 『완당전집』권3

추사는 권돈인에게 만허의 차를 구해 달라고 청한다. 당시 추사와 만허는 서로 교유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만허의 차를 얻어 추사에게 준 영남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사 글씨를 좋아했던 인물인 듯하다. 하여간 추사는 쌍계사의 만허가 만든 차향에서 40년 전에 맛보았던 용봉승설의 향기를 떠올린 것이다. 완원을 통해 알게 된 차의 세계는 추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황홀한 경험이었고 그가 차를 품평하는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50년께는 제주 유배지에서 해배돼 강상(江上)에 머물던 시기다. 당시 권돈인에게 보낸 이 편지로 인해 조선 후기 쌍계사에서 만든 만허의 차는 명품이었고 중국 명차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귀품이 생산됐음이 확인된다. 한편 명차의 출처를 알게 된 추사는 만허에게 김과 차종, 그리고 자신의 글씨를 보내 서로의 교유를 돈독히 하는 한편 차를 받은 후 답례를 정중히 했다. 이러한 사실은 추사가 만허를 위해 지은 시 서문에서 확인된다. 만허가 만든 차 맛에 감동한 추사는 ‘희증만허(戱贈晩虛)’와 ‘차사이정쌍계(茶事已訂雙鷄)’를 지어 답례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열반이란 마설로 헛된 세월을 보내니(涅槃魔說送驢年)
그대만은 눈 바로 박힌 사람을 귀하게 여기겠지(只貴於師眼正禪)
(나는)차를 마시는 일과 또 학문하는 일을 겸했으니(茶事更兼參學事)
금탑의 빛을 흠씬 받은 차를 마시라고 권하겠지(勸人人喫塔光圓)
‘희증만허(戱贈晩虛)’ 『완당전집』권10

쌍계사 봄빛, 오랜 차 인연(雙鷄春色茗緣長)
제일 가는 두강차는 육조탑 아래에서 빛나네(第一頭綱古塔光)
늙은이 탐냄이 많아 이것저것 토색하여(處處老饕饕不禁)
입춘에 다시 향기로운 김 보낸다고 약속했네(辛盤又約海苔香)
‘차사이정쌍계(茶事已訂雙鷄)’ 『완당전집』권10

이 시는 차를 청하는 은근함이 배어난다. 아마 만허와 내왕이 빈번해진 후 지은 것이라 짐작된다. 추사 바람대로 만허에게 걸명(乞茗)할 만큼 서로가 돈독한 내왕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만허의 차는 중국의 용정이나 두강보다도 좋았다 했거니와 절간에도 이보다 더 좋은 차는 없다고 평한 것은 추사다. 이처럼 만허의 차를 높이 평가했던 그는 육조탑에 차를 올릴 때 쓸 귀한 찻종 한 벌을 보내 차를 준 그에게 답례했다. 한편 만허가 풀기 어려웠던 난마와도 같은 불교 교리를 통쾌하게 정리해준 사실도 이 시 서문에서 확인된다. 불교에 해박했던 추사였기에 교리의 난마를 풀지 못해 결박당한 듯한 승려들의 포박을 추사가 풀어주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불교 지식을 보시해 교리에 어두웠던 승려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던 공덕은 승려들이 그에게 차를 보낸 연유이기도 하다. 서로의 답답함을 이렇게 상보(相補)했던 추사의 인정은 본받기에 족하다. 더구나 추사의 글씨는 당대에도 소장하고 싶은 명품이었으니 이 또한 서로를 돈독하게 만든 예품(禮品)이었던 셈이다. 추사가 남긴 글씨 중 유독 승려들에게 써준 글씨가 많은 것은 이런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추사에게 잊을 수 없는 차 벗은 초의다. 이들을 연결한 징검다리는 다산의 아들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1783~1859)이었다. 초의가 1815년 처음으로 상경해 추사를 만났던 학림암도 유산의 배려로 머물렀던 암자였다. 초의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것은 다산 형제들이었다. 이곳에서 초의는 평생 뜻을 나눌 벗을 만난 것이다. 모두 다산으로부터 연결된 인연의 고리였다. 사람의 인연은 사소하게 시작돼 점차 창대(昌大)해지는, 보이지 않게 연결된 끈과 같다.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진리다.

추사의 차 생활이 더욱 심화한 것은 아마도 제주 유배 시절일 것이다. 당시 추사에게 차를 보낸 후원 그룹은 초의를 비롯한 대흥사와 만덕사 승려들이 주를 이룬다.

완당난화

척박한 유배지 제주는 그가 견딜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비통함과 울분을 차로 달랬다. 풍토병을 다스린 것도 차였다. 제주 시절은 혹독했지만 그를 더욱 담금질해 예술과 학문의 승화를 이룬다. 바로 추사체의 완성이다. 더구나 쓸쓸한 제주 시절 추사와 초의를 연결해준 전령은 소치 허련(小癡 許鍊·1809~93)이었다. 이들의 끈끈한 학연은 어떤 연유로 이어진 것일까. 진도 사람 소치가 대흥사 한산전으로 초의를 찾아온 해는 1835년이다. 그가 한산전에 머물며 초의에게 불화 그리는 것을 배우게 된 일이나 공제의 화첩을 빌려 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초의의 배려 덕분이었다.

초묵법(焦墨法·진한 먹을 사용하는 화법)에 능했던 초의는 관음상을 잘 그렸는데 이 첩을 본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1840)은 이를 소장하려 했다. 이러한 사실이 1839년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에서 확인됐다. 소치가 초기 불화를 그린 연유는 이처럼 초의와 관련 깊다.

차 애호가 추사는 물을 평가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차 품격은 물에 의해 드러난다는 걸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그가 지은 ‘수미변(水味辨)’에 “물을 분별하는 것은 (물의) 경중을 샘의 높고 낮은 위치로 가늠하였고, 은두(銀斗·은으로 만든 계량기)를 만들어 견주었다(辨水者 於其輕重 分泉之高下 製銀斗較之)”고 하였다. 바로 물의 경중이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물론 이는 송대에 차를 즐긴 문인들이 물을 분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자료를 살펴봤다는 사실에서도 그가 차 이론에 밝았던 다인이란 걸 알 수 있다. 그의 차에 대한 안목이 초의차(草衣茶·사대부들은 초의가 만든 차를 이렇게 불렀다)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 후기 차 문화의 중흥은 차의 가치를 알았던 사람들이 음다층의 토대를 굳건히 했기에 가능했다. 이런 시대적 조류의 중심엔 추사가 있다. 척박한 환경을 감내했던 그의 결기가 차의 온기(溫氣)에서 나온 것이라는 평가는 과장된 것일까.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성균관대 겸임교수.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로는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사송』 『추사와 초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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