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아빠·엄마·누나 운동선수 … 나도 유전적으로 손 잘 쓰는 것 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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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호주에서 끝난 아시안컵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한국 선수를 들라면 골키퍼 김진현(28·세레소 오사카)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그는 정성룡(30)·김승규(25)와 치열한 축구대표팀 수문장 경쟁을 거친 끝에 주전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는 고비 때 마다 빛나는 선방으로 한국의 아시안컵 준우승을 이끌었다. 조별리그부터 4강전까지 4경기 무실점을 기록하자 울리 슈틸리케(61) 축구대표팀 감독은 “한국에 이런 골키퍼가 있었는지 몰랐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활약 덕분에 한국대표팀의 가장 취약한 포지션이 가장 안정감 있는 자리로 변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팬들은 김진현에게 신(神)을 뜻하는 ‘갓(God)진현’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소속팀(일본 세레소 오사카)에서 휴가를 받아 국내에 머물고 있는 김진현을 6일 만나 아시안컵을 마친 소회를 들어봤다.

그라운드에서 냉철한 모습을 보였던 축구대표팀 수문장 김진현이 환하게 웃었다. 선후배와 치열한 경쟁 끝에 주전 골키퍼로 떠오른 김진현은 “이탈리아의 부폰과 같은 골키퍼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 아시안컵에서 빛나는 활약을 펼쳤는데.

 “아시안컵 기간 대표팀 동료들이 ‘갓’이라고 부르더라. 처음에는 ‘삿갓’의 ‘갓’인줄 알았다(웃음). 아직까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데 부끄럽고, 감사할 따름이다.”

 - 결승전이 끝나고 아쉬워서 잠도 못 잤다고 들었다.

 “지난해 12월 중순 제주도 전지훈련부터 한달 반 가량 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생활을 했다. 막상 준우승을 하고나니 무척 아쉬웠다. 결승에서 준비한 대로만 하면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래도 슈틸리케 감독님이 나를 안아주시면서 ‘잘했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기뻤다.”

 김진현은 아시안컵 5경기에 출전해 4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했다. 김진현은 “4경기 연속 한 골도 허용하지 않은 건 내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털어놨다. 세이브(직접 선방)도 15차례나 기록했다. 김진현은 “다리에 쥐가 올랐는데도 끝까지 뛰어준 동료들의 도움 덕분이다. 수비수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해 준 공격수들도 고마웠다”고 말했다.

 - 아시안컵에서 스스로 꼽는 최고의 선방은.

 “조별리그 3차전 호주전에서 후반 25분 네이선 번즈의 슈팅을 막은 것이다. 그 선수가 페널티 박스 안으로 무서운 속도로 치고 들어오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슛을 날렸다. 슈팅 템포도 무척 빨랐는데 침착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면 막지 못할 뻔 했다.”

 - 8강전과 결승전에서 연장전을 치렀다. 만약 승부차기까지 갔다면 어땠을까.

 “승부차기는 자신감이다. 얼마나 나 자신을 믿느냐에 달렸다. 승부차기를 했다면 무척 떨렸겠지만 그런 상황을 미리 대비한 것도 사실이었다. 승패에 연연하기보다 나와 동료선수들을 믿고 당당하게 나섰을 것 같다.”

 김진현의 집안은 스포츠 가족이다. 김진현의 큰이모부는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핸드볼에서 은메달을 따냈던 신영석 씨다. 김진현은 “할아버지가 축구, 아버지·어머니는 농구·배구, 누나는 핸드볼, 막내 이모는 유도 선수를 지냈다”고 말했다.

 - 골키퍼를 하게 된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와 농구를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매년 10cm씩 성장할 정도로 키가 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부 감독님의 눈에 들었고,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골키퍼를 맡았다. 아버지는 농구, 어머니는 배구 선수 출신이기에 유전적으로 손을 잘 쓰는 것 같다(웃음).”

 -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축구를 그만 두려 했다. 기량이 늘지 않아 축구가 재미없게 느껴졌다. 그 때 고등학교 은사님이셨던 김학철 감독님(현 서해고 감독)이 붙잡아 주셨다. 감독님과 함께 있으면서 공을 갖고 발로 하는 기술도 배웠다. 그때부터 빌드업(공격 전개) 능력을 키웠다.”

 - 아시안컵을 계기로 대표팀 주전 골키퍼로 올라섰는데.

 “아니다. 나는 여전히 ‘넘버3’ 골키퍼라고 생각한다. 아시안컵 활약을 점수로 매기자면 나는 10점 만점에 2~3점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고쳐야 할 게 많다. 성룡이형이나 승규와의 경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골키퍼로서 특별한 비법은 없다. 오직 날아오는 공은 다 막아야 한다는 게 내 신조다. 훗날 많은 축구팬들로부터 ‘골키퍼는 무조건 김진현’이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더욱 열심히 뛰겠다.”

글=김지한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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