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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데가지 버티는게 소련생리 "KAL기 격추"시인 왜 6일이나 걸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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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엿새. 소련이 KAL기 격추사실을 시인하는데는 여섯밤 여섯날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외부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꾸물거림이었다.
소련이 6일 뒤늦게 격추사실을 공식시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까닭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다.
내부적요인, 특히 당지도층과 군의 대책협의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아직 아무런 정보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으므로 논외로 하고, 우선 소련은 격추사실을 인정조차하지않는데 대한 국제적 비난을 식히기위한 최소한의 양보로 전술을 바꿨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이 유엔안보리에서 KAL기를 격추한 소조종사와 지상지휘소사이의 46분동안의 교신내용을 공개하기 직전에 타스통신이 「자인성명」을 발표한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버틸수 있는데까지 버티다가 최후의 궁지에 몰리기 직전 자세를 조금 바꾼셈이다.
발표시기에서 눈에 띄는 또한가지는 사건발생 1주일이지나 충격이 어느정도 흡수된때, 특히 미국의 미지근한 응징조처가 발표된 직후라는 점이다. 그래서 일부관측통들은 소련의 입장에서 기왕늦은 바에야 6일이 발표에 가장 적절한 때였다고까지 말하고있다.
그 엿새동안 소련이 취한 정보공개의 방식, 즉 조금씩 말을 바꾸면서 최종 자인에 접근하는 지극히 우회적이고 단계적인 태도는 소련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들에겐 아주 낯익은것이다. 말썽의 소지가 있는 큼직한 국제적 사건은 물론 국내의 대형사고나 재난을 보도하고발표할때마다 소련당국이 늘 보여준 관례이기 때문이다.
천재지변이건 인간에 의한 사고 이건간에 소련에선 큰 사건의 상세한 내용이 처음부터 바로 밝혀지는 적이 거의 없으며 끝까지 모든 진상은 알려지지 않는다. 사건의 첫보도 혹은 발표는 대개 발생한지 며칠에서 몇달쯤 지나서야, 그것도 짤막하게 나온다. 그나마 아주 조심스레 골라진 용어들에 의해 미묘하게 표현되곤 하므로 보도에 접하는 사람들은 어간·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한다.
『그들이 전하는 「암시」들을 꾸준히 지켜보며 짜맞추면 무언가를 알수있게 되지요. 다 그게 크렘린관측의 요체입니다.』모스크바의 한 서방외교관의 말이다.
KAL기격추를 인정한 성명에도 소련기가 KAL기의 『비행을 중지시켰다』고 했을뿐 미사일을 「발사」했다거나 「격추」 했다는 표현은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정도만 해도 소련관례로는 모든것을 공식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말 「유리·안도로프프」가 집권한후 소련의 보도기관들은 사고나 관료들의 비행사실을 예전보다는 신속하게 전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도 비교적 작은 사건들의 경우일뿐, 서방측에서 큰관심을 보일만한 일들에 관해서는 여전히 「묵비권」을 써왔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KAL사건 며칠후인 지난 5일 소련의 한 지방신문은 72명의 승객을 「태울수 있는」 한 여객기가 카자크스탄에서 추락했으며 탑승자전원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모스크바주재 기자들은 이신문을 보고서야 사고발생을 알았다. 사망자수는 언급되지 않았다. 프라우다지나 타스통신등 전국적보도기관에선 이재난을 전혀 취급치 않았다.
사고발생일은 보도 1주일전, 8월30일이었다.
▲석달전 볼가강에선 수백명을 태운 여객선이 철교교각에 부딪쳐 침몰했었다. 사망자가 최소한 2백40명이라는 소문과 보도가 나돌았지만 당국은 아직껏 피해상황을 발표않고있다.
▲82년7월 소국영항공인 아에로플로트기가 공항서 이륙하다 추락, 약90명이 사망했을때도 당국은 짤막한 발표와 함께 『피해자가 좀 있다』고만 밝혔다. 그나마 사망자중 외국인이 많이 섞여있기에 피해상황이 언급됐다는 얘기다.
이밖에 지난해말 아프가니스탄의 한 터널을 지나던 소련군수백명이 목숨을 잃은 사고에 대해서도 추측만 요란히 나돌았을뿐 공식발표는 없었다.
『소련당국은 어쩔수없는 때가 아니면 국내의 참사들은 거의 보도하지 않습니다. 규모가 아주 크거나 외국인이 많이 관련됐을 때라야 무언가 발표하지요.』 모스크바주재 외교관의 말이다. 『KAL기의 경우도 국제여론에 대처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공개하고 있는겁니다.』
이번 사건처리에서 보여진 소련의 공보전략은 「사건이 생생할때는 최소한의 정보공개, 차차 식어감에 따라 상항을 판단해가며 조금씩 많은 정보를 밝힌다」는 말로 요약할수있다.
1일새벽 사건발생직후 서방신문들의 요란한 제1보보도와는 대조적으로 소련보도기관들은 『한국비행기 한대 실종』이란 짤막한 기사만을 내보냈다. 1일 서방측이 격추를 비난하기 시작하자 프라우다지는 『미확인 비행기가 영공을 침범했으며 착륙을 거부했다』는 타스통신을 인용, 외신면 아래쪽에 두문단짜리 기사로 취급했다 .다른신문들도 똑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그날저녁 국영TV 3개채널로 동시에 나가는 뉴스시간엔 첫번째보다 조금 긴 타스성명이 KAL기의 항로이탈·영공침범을 보여주는 지도와 함께 방영됐다.
다음날 세계의 반응이 더욱 요란해졌을때도 프라우다의 머리기사는 당정치국 정례모임이 생산성과 임금, 그리고 컬러TV생산계획등을 협의했다는 것이었다. 전날밤의 타스성명과 지도는 신문안쪽에 실려있었다. 정치국이 KAL사건을 논의했다는 얘기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나 소련의 알만한 독자들은 조그만 타스성명기사의 중요성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수 있었다. 행간을 읽는 요령 덕분이다.
소련에선 아무 성명도·없이 「타스성명」이란 제목만 붙어있는 기사가 흔히 매우 중요한 사실에 대한 최고정책기구의 태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사건발생 사흘뒤 타스성명은 이사건의 배후에 미국의 도발이 숨어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방향」이 결정된 것이다. 이때부터 정보와 논평은 급속히 늘어났다. 장성 한사람이 프라우다지에 이 사건을 소련입장에서 상세히 분석하는 기고문을 싣는가하면 TV해설자는 미국을 비난했다. 이와함께 월요일부터는 「미확인 비행기」란 표현이 한국의 KAL기로 바뀌었고 「경고사격」을 한 사실도 시인했다. 프라우다는 방공군참모장 「세미온·로마노프」 중장의 말을 빌어「여객기의 추락』 과 『많은. 생명의 희생』 을 인정했다. 그리고 하루뒤 타스성명은 「격추」를 사실상 자인했다.
모스크바의 서방관측통들은 소련당국의 정보유출이 마치 눈송이처럼 단계적으로 불어나고 구체화하는 현상에 대해서 지도층내부의 의견불일치 탓일 가능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어떤 일에든, 특히 곤란한 문제에 부닥뜨렸을때 소련체제가 보여주는 느린반응속도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안도로포프」자신도 중요한 문제들을 다룰때는 신속한 결정보다 신중히 고려된 조심스런 반응쪽을 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방외교관들은 이런 본질적요인 외에도 당국은 소련기가 비무장한 민간인들을 대량살상한 사실을 인정할때 소련국민을에게 줄 충격과 영향을 우려하고 있는듯하다고 말한다. 이번사건이 미국의 스파이활동 때문이라는점을 강조하는것도 러시아인들의 뿌리깊은 외국공포증에 호소해 정부의 행동에 대한 당혹감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목적에서라고 분석가들은 말한다.
한 TV해설가는 미국을 나치독일에 비유해 비난하기까지했다. 서방측에선 전혀 수공할수 없는 비유지만 2차대전의 비극과 나치만행을 직접 겪은 수많은 소련인들에게 이같은 비유는 악몽같은 기억을 되살려 치를 떨게하는 효과를 낼수있는 것이다. <정춘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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