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행의 현장에 통곡만 표류|절규로 가득찬 KAL기 희생자 해상 진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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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왓까나이 (치내)=김재봉·최재영 특파원】『어-이-, 들리는가! 영혼이여 대답해다오』-. 육친의 이름을 불러대는 유족들의 애끓는 절규가 검푸른 국경의 바다에 노도처럼 메아리쳤다. 한발씩이라도 현장 가까이 접근하려는 비통한 유족들의 염원을 싣고 진혼선 제5종곡환이 5일 상오11시 비극의 사할린 해역 모네론도 (해마도) 남남 동쪽 약 40km해역에 도착했다. 유족들이 뱃전을 치며 울부짖는 가운데 거행된 진혼제에서는 KAL기로 공수해온 5백 송이의 국화꽃 조화가 바다에 던져져 원혼을 달랬고 희생자 2백69명의 명복을 비는 묵념이 있었다. 약 10분 동안 진행된 진혼제에서 재일 동포 채승석씨 (47)는 비명에 간 12세의 아들 수명 군의 이름을 외치며 수명 군이 평소 입던 바지에 벨트까지 꿴 뒤 털 셔츠와 함께 바다에 던지며 울부짖었고 유족들 중에는 차가운 바닷물을 물통으로 퍼 올려 병에 담아 품에 안는 애처로운 모습도 보였다.

<소 군함이 멀리서 지켜봐 울분 못 참아>
진혼제가 올려진 해역은 KAL기가 격추당한 곳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있는 모네론도 남쪽 40km 부근, 왓까나이 북방 65km 해역으로 북위 45도57분05초, 동경 1백41도22분06초 지점.
진혼제는 KAL측이 서울에서 공수해온 국화꽃 5백 송이로 만든 조화 다발 10개를 유가족 대표 김인동 (33·서울 장위동233의 486·피격 KAL기 기관사 김의동씨의 형), 윤경로 (47·서울 구산동 23의9·KAL기 사무장 윤량로씨의 형), 김준명 (59·서울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 33동605호·KAL스튜어디스 김영란 양의 친척)씨 등 3명과 조중건 KAL부사장이 바닷 속에 헌화하고 희생자 2백69명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올린 뒤 10여분만에 끝났다.
10개의 조화는 바닷물속에 던져지자 고인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듯 종곡환 주변을 7∼8분동안 빙글빙글 돌다가 조류에 밀려 북쪽으로 떠내려 갔다.
이때 유족 대표 김인동씨는 『의동아, 의동아』하고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뱃전을 잡고 울부짖었다.
유족들은 진혼제를 올리는 해역에서 아무런 부유물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몹시 안타까와했다.
일본 순시선 3척의 호위를 받으며 제5종곡환( 동일본 페리 소속·8백t)에 탄 유족들은 진혼제가 진행되는 동안 모네론도 쪽에서 소연 해군 함정으로 보이는 배 2척이 지켜보고 있어 유족들의 분노로 더하게 했다.
유족 대표 김씨는『의동이의 시체를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죽음을 믿을 수 없다』 고 목놓아 울었고 윤씨는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이번 기회에 단호한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진혼제는 유족 대표 3명과 대한항공 조부사장 등 직원 10명, 미국인 유족「스티븐슨」 (33·보스턴 거주), 호주인 「브루스·하딩」씨와 일본인 유족 등 5명 외에 한국에서 급파된 기자 30명과 일본 보도진 1백여명이 이를 지켜보았다.
진혼제가 올려진 바다는 파고 50cm·초속 12m로 쾌청한 날씨였다.
KAL기 피격 사건 조사 및 희생자 진혼단은 4일 상오 9시20분 KAL특별기 (보잉 727)로 김포공항을 출발, 상오 11시49분 북해도 지또세 (천세) 공항에 도착했다.
진혼단은 지또세 공항에서 내외 기자 회견을 가졌는데 조중건 단장은 『이번 사건에 협조해준 일본 정부에 대해 우선 감사한다』고 말하고 『우리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더욱 확실히 알수 있게 됐다』면서 희생자에 대한 보상은 몬트리올 협약에 따라 개인별 연령·직업·환경을 고려해 산정 되겠지만 1인당 평균 7만5천 달러 정도가 지급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유족 대표 윤경로씨는 『진실을 알고 싶어 일본까지 왔다』고 말하고 『일본 언론도 진실을 파헤치는데 협조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진혼단은 기자 회견이 끝난 후 하오 3시 KAL에서 전세 낸 일본 근거리 항공 (NKA)의 YS-11기로 지또세 공항을 출발, 하오 4시30분 왓까나이 공항에 도착, 곧바로 왓까나이 시청에 설치된 대책 본부로 가서 「하마모리」 시장을 예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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