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진 기자의 맛난 만남] 한화 김인식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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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다.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나타나 인사인양 눈짓 한번 건네더니 앉은뱅이 상에 마주 앉는다. 밑반찬이 나오고 따끈한 추어 튀김 접시가 상 위에 놓일 때까지 그가 한 말이라곤 “허”나 “음”같은 단음절 대답뿐. “워낙 과묵한데다 포커페이스로 유명하다”는 것은 김인식 프로야구 한화 감독을 만나기 전, 가장 많이 들었던 ‘주의사항’이었다. 끊어진 이야기를 어떻게 이을까 이마를 긁적이는데, 그가 젓가락으로 튀김 접시를 가리킨다. 밥 먹자고 만났으니 일단 먹어야 할 것 아니냐는 거다.

글=신은진 기자 <nadi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손가락 굵기만 한 어린 미꾸라지를 통째 풋고추에 넣어 튀겨냈다. 추어탕은 알이 굵은 미꾸라지를 써야 기름지고 진한 맛이 우러나온다지만, 튀김은 뼈가 연하고 살이 부드러운 잔 것을 써야 통째로 씹을 때 감칠맛이 난다. "처음 문을 열고부터 5년째 단골 손님이시지만 나도 길게 대화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고 식당 여주인이 한마디 거든다. 해외 전지훈련을 떠나면 두툼한 스테이크를 썰면서도 뜨끈한 국물이 간절했단다. 귀국하면 제일 먼저 찾곤 하던 식당이 잠실 야구장 인근 추어탕집. 지난해 한화 이글스를 맡아 대전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지인들과 자주 들렀었다.

"배추 같은 거 썰어서, 야채를 한 세숫대야는 먹어야 해. 거기다 우유에 청국장 가루를 타서 한잔 마셔." 요즘 그의 아침식단이다. 지난해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부터 채식 위주로 식단을 바꾸고 먹는 양도 절반으로 줄였다. 기름진 음식이 나오기 마련인 회식에서는 회덮밥.비빔밥 같은 메뉴를 따로 시킨다. 즐겨 마시던 '다방 커피'에서 설탕을 빼고, 하루 2갑씩 피우던 담배와 저녁 술자리도 끊었다. 가장 생각나는 음식은 계란. 앉은 자리에서 10개씩 먹곤 했다. 절친한 사이인 하일성 KBS해설위원과 밤새 술을 마시고 새벽녘에 계란 프라이 20개를 시켜 나눠 먹으며 해장을 했었단다.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돼 입원했을 때에는 '야구를 그만두게 되는 것 아닌가' 싶어 늘 여유롭고 침착한 그도 더럭 겁이 났다. 다행히 회복이 빨랐다. 입원한 지 열흘 만에 휠체어에서 일어나, 두 달 만에 그라운드에 돌아왔다. 아홉달을 넘긴 지금, 겉으로는 병색을 찾을 수 없다. 하루 한 시간 가벼운 운동과 마사지.식이요법을 꾸준히 해온 덕분. "아직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어. 계단 오를 때 힘들지. 완전히 나을 수야 있겠나. 계속 가는 거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추어탕 뚝배기가 상 위에 오른다. 산초가루 종지를 밀어주자 고개를 저으며 다진 고추만 숟가락에 조금 뜬다. 다른 맛을 가리는 강한 향 때문에 산초를 넣지 않고 먹는다. 비린내가 조금 나더라도 있는 그대로 솔직한 편이 낫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 강압적인 태도로 선수들을 휘어잡으려 하거나 선두에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감독의 모습은 그와 거리가 멀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선수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기 기량을 펼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 그의 방식. "다른 팀과 반대로 한화는 선수들이 서로 감독 가까이 앉으려 하더라"는 이야기가 나올 만하다.

'김인식표 리더십'은 이번 시즌 프로야구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였다. "한물갔다"는 소리를 듣던 선수들을 추슬러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팀을 꾸렸다. 타 구단에서 버림받은 고령 선수들의 숨은 장점을 끌어내고 자신감을 심어줬다. 꼴찌 후보로 꼽혔던 한화는 정규리그 4위에 오르고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재활의 신'이란 패러디물이 인터넷에 떠돌 만큼 대중적인 인기도 모았다.

"지들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한 거지. 내가 뭘…." 뚝배기에서 푹 고아진 시래기를 한 입 떠올리며 말끝을 넘긴다. 평소 선수들에게 잘못된 점을 일일이 지적하지 않는다. 프로선수쯤 되면 자신의 약점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실수하지 마라, 고쳐라 자꾸 큰소리를 쳐봐야 조용히 믿고 지켜보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대신 '야구 말고 다른 얘기'를 많이 한다. 음주운전은 안 된다, 두세 번 얻어먹었으면 꼭 한번은 밥을 사라, 아내에게 잘해라 등등. "사실 그런 게 인생을 좌우하는 일이거든"이란 설명이다.

추어탕 그릇을 밀어내고 물을 찾는다. 밥을 절반쯤 남겼다. 가방에서 큼직한 약봉투를 꺼내더니 알약을 하나 삼킨다. "끼니때마다 챙겨먹어야 하는데, 자꾸 잊어먹어. 아주 귀찮아." 병상에서 일어난 다음부터를 '보너스 인생'이라 여긴다.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야구 생각을 더 하게 됐다. 어린 시절, 돈암동에서 경동중.고교의 야구 시합을 보고 친구들을 다리 밑에 모아 선수들의 폼을 흉내내며 놀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야구밖에 없었다.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식당을 나섰다. 거구인 그가 오른 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천천히 걷는다.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다 건강하시라고, 한번 더 소리쳐 인사를 했다. 반쯤 뒤돌아서더니 어린애들이 하듯, 그가 한쪽 손을 별모양으로 반짝반짝 흔들어 보였다.

김인식 감독이 소개한 춘향골 남원추어탕

미꾸라지를 된장으로 간을 맞춰가며 푹 삶아 으깬 뒤, 들깨.시래기.무 등을 넣고 끓여 맛을 낸 남도식 추어탕집. 국물이 걸쭉하기보다 담백하고 맑다. 부담없이 입에 붙고 시원하게 넘어가는 맛에 김 감독은 소주 한잔을 아쉬워했다. 미꾸라지는 '고기 어(魚)'에 '가을 추(秋)'를 합친 추어(鰍魚)라는 이름대로 요즘이 제철. 겨울 동면에 들어가기 전, 기름이 배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상태라 가장 맛있단다. 양파.고추 등 야채와 함께 튀겨 내오는 추어튀김은 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별미. 비린내 없이 깔끔해 추어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인기다. 추어탕 7000원, 추어튀김 1만(小)~2만원(大). 잠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건너편 mbc 아카데미 뒷골목. 02-422-5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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