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지씨|고려때 「11대 36평장사」내며 융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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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씨는 충주단일본이다.
문헌에는 충주외에 단양·광주 두본과니 보이나 모두 충주의 분파.
그밖에도 충주어씨가 지씨 조상에서 어씨 성을 받아 분가한 한핏줄의 다른 성씨다.
시조는 고대초(광종 11년·960년)중국 송나라의 태학사로 사실이 되어 고대에 왔다가 눌러앉아 한국인이 된 지경으로 전한다.
이후 1천년, 30여대를 내려오며 남국에만 14만여며을 헤아리는 「저성」으로 발전, 인구순위 48번째에 올라있다.

<송의 지경이 시조>
지씨는 특히 고려조에 명문신족으로 융성을 누렸다. 대조적으로 조선조에는 재야의 토목으로 고고한 선비가의 전통을 세워왔다.
고려대 지씨의 융성을 말해주는 것이 「11대 36평장사」.
시조 경과 그의 두 아들 해실·도실을 비롯, 16세까지 4백여년에 11대 36명이 「정승」에 해당하는 평창사의 고위직을 역임했다는 것이다.
그중에도 공민왕때 친원파의 거두로 이인임등가 더불어 국정을 좌우했던 권신 지재(평장사), 정몽주와 더불어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다 이성계의 손에 귀양가 죽은 지용기(문하찬성사), 왜구와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운 지용도·지용수형제등 4명을 고려조 지문의 사걸로 꼽는다.
지용기는 요동정벌 때는 이성계에게 동조, 희군에 참가해쓰나 이성계의 쿠데타 음모에는 반대하다 내쫓겨 귀양갔는데 포은 정몽주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에 「말을 끊고 먹지도 않고 눕지도 않는」항의시위 13일만에 절사했다고 전한다.
충주어씨의 시조가 된 지중익도 평장사에 오른 인물. 겨드랑이에 비늘이 있어 어씨로 성을 받았다고한다.
고려조와 이같이 대대로 깊은 인연을 맺었던 지씨들은 이성계의 새왕조가 들어서자 불사이군의 의리를 지켰다. 대부분 조선조에 등을 돌렸다고 한다.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거나 일부는 아예 멀리 새 개척지인 성경진지방에 이주, 새 생활의 터전을 닦고 문화의 씨를 퍼뜨리기도 했다.

<불사이군 충절 지켜>
그래서 지씨는 조선조 5백년동안 문과급제자가 11명뿐, 벼슬보다는 숨은 선비가문의 전통을 꿋꿋하게 지켜온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세종조의 지계(선공감직장)와 그 후손들의 8대 9진사등 진사만 75명을 배출, 학문의 전통과 양반의 지체를 이었다.
조서조의 지씨 인문중 두드러진 사람은 임진왜란당시 성경도에서 정문부·최배천등과 의병을 일으켜 가등청정의 침략군을 성경도에서 몰아내고 국경인·국세필등 반란 부역자를 처단하는등 공훈을 세운 지달원이 있다. 그는 유학자였으나 무략에도 뛰어나 제자들을 이끌고 왜군과의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며 택당 이식을『마천영북쪽 미개한 땅에 2백년래 제일호걸』이라고까지 칭송하기도 했다. 죽은 뒤 유림들이 경성에 창렬사를 세워 그를 배향했다.
지용기의 후손인 지여해는 내자재란에 남한산성에서 전사한 충신. 그의 종형 덕해도 충청도 소망관으로 의병을 모집,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다 인조의 항복소식에 분을 못이겨 병이나 죽었다.
그에 앞서 수양의 정변에 지정(충청절제사)은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당하는등 충절의 전통이 남달랐다.
조선조에 다소 침체했던 지씨는 근대이후 다시금 고려조의 융성을 회복해가는 느낌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나라 종두법의 보급자 지석수은 소종13년(1876년)수신사 김기수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종두법을 배워온 스승 박수선에게서 종두법을 익혔고 그 3년뒤인 1879년부산의 일본인 병원 제생의원에서 두달동안 이를 실습한 뒤 그해 겨울 고향인 충주 덕산면에서 40여명에게 종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종두의 시작이다.
이듬해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간 그는 우두제조법을 포함한 종두의 기술전부를 모두 배워와 전주·공주등지에 우두국을 설치, 종두의 전국적인 보급을 시도했다.
그때까지 평생 한번은 앓아야하는 것으로 알았던 「마마」천연두의 예방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의 형인 지운영은 유명한 서예가·화가·시인으로 시·서·화 삼절의 일컬음을 받았던 인물.
한미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나라가 망한 뒤 학교를 졸업, 일군소위가 됐던 지청천은 1919년 3·1운동직후 일군을 탈출, 만주로 가 항일독립전쟁의 지휘관이 됐다.

<종교계엔 지학순>
가장 빛나는 승리가 유명한 청산리전투. 해방후 귀국, 초대 무임소장관을 역임했다.
그밖에도 한미 강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군 1개중대를 무찌르고 전사한 지홍문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군에 피살당한 지하영등 열사들을 배출했다.
현재 국회에 지정도·지갑종 2명의 국회위원을 내보내고 있으며 관계에 지달현국립보건원장, 지서하국립종축장장, 지연태·지성구대사, 지창수국세청차장이 있다.
지학순주교는 「재야」의 종교계인사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군에는 육군의 지일환소장·지희원준장, 공군의 지용권준장, 예편한 육군소장 지경환씨등이 지씨의 이름을 지킨다.
박정희대통령의 주치의였던 지홍창박사는 작고했으나 지헌택전 대한치과의사협회장등 20여명의 의사가 우리나라 근대의학 개척자를 낸 가문의 명예를 빛내며, 철학의 지명관교수등 대학교수도 30여명을 헤아린다.
도예가 지순택씨도 알려진 이름이며 국립묘지를 터잡고 이박사, 박대통령등 유명인의 묘소를 도맡다시피가린 당대의 지사·역술가 지창용씨가 특히 이채를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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