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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기의 그리스 돈줄 차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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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기습이었다. 마리오 드라기(68)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4일(현지시간)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리스 급진좌파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41)가 사자(使者)로 급파한 재무장관 야니스 비루파키스를 만난 직후였다. 게다가 앙겔라 메르켈 등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주요 리더들이 그리스가 제안한 구제금융 만기연장 등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직후였다.

톰슨로이터는 이날 전문가의 말을 빌려“치프라스가 채권단인 트로이카(EU·IMF·ECB) 대신 메르켈 등 정치 리더들과 타협을 통해 구제금융 만기 연장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대해 드라기가 강한 견제구를 날렸다”고 평했다. 드라기 조치는 11일부터 발효된다. 그리스 시중은행은 ECB 대신 자국 중앙은행에 의지해야 한다. ECB 자금의 금리는 연 0.05%다. 반면 그리스 중앙은행의 긴급자금 금리는 연 1.55%다. 그리스 시중은행들엔 버거운 부담이다. 그리스는 2월 말까지 트로이카와 구제금융 만기 연장 협상을 마무리해야 한다. 치프라스의 원래 생각은 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ECB의 자금을 지원받아 버티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게 헝클어진 것이다.

드라기가 근거 없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 국채는 정크본드나 마찬가지다. ECB가 담보로 잡고 그리스 시중은행에 단기 자금을 빌려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담보로 인정해줬다. 이제부터는‘법대로 하겠다’는 얘기다. 드라기는 이날 성명에서 “그리스가 합의된 긴축과 구조조정 작업을 하지 않아 국채의 신뢰성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를 댔다.

드라기의 기습 타이밍은 절묘했다. 톰슨로이터는 “치프라스 집권 이후 그리스 시중에서 예금 인출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며 “이미 두 개 은행이 자금난에 허덕이는 증상을 보였다”고 전했다.

당장 ECB의 자금 지원이 끊겼다고 그리스가 부도나진 않을 전망이다. 블룸버그는 “그리스 시중은행은 2013년 자국 중앙은행 자금에 기대 생존했다”고 했다. 다만 앞으로 힘겨운 행군이 계속될 전망이다. 그리스는 다음달까지 160억 유로에 가까운 구제금융을 갚아야 한다. 트로이카가 정한 그리스 단기 차입한도는 150억 유로다.

이날 드라기 조치로 치프라스는 자신의 처지를 절절하게 느낄 전망이다. 블룸버그는 이날 전문가의 말을 빌려 “치프라스는 자신의 팔에 수갑이 아주 단단하게 채워져 있음을 자각했을 것”이라고 평했다. 드라기의 요구 사항은 간명하다. 대화는 하겠는데 먼저 긴축과 민영화 약속은 지키라는 얘기다. 이제 치프라스가 응수할 때다. 뾰족한 수가 없다. 그는 이미 부채탕감 요구는 철회했다.

비슷한 처지인 스페인마저 강하게 반대해서다. 그리스 영자신문인 카트메리니는 “치프라스가 여전히 정치적 타협을 추진한다”며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돌파구를 열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랑드가 나서 긴축 위주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수정해주길 바란다는 얘기다. 블룸버그는 전문가의 말을 빌려 “드라기의 이번 조치는 정치적 타협이 이뤄져도 ECB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전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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