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7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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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물론 유신시대에 처음인 문화패 시위의 의미는 매우 뜻이 깊었다. 문학패 외에도 탈춤패 연극패 등이 시위의 주체가 되었는데 이들은 칠팔십 년대 내내 스스로 조직력과 현장을 갖추면서 '문화운동'이라는 개념을 형성해 나갔다. 특히 광주에서의 '씨앗 뿌리기'는 이후 항쟁의 직접적인 기폭제 노릇을 하게 된다.

문단에서는 김지하에 이어 시인 양성우가 또 구속되었다. 그는 광주에서 교사직에서 해직된 뒤에 서울에 올라와 이시영과 송기원이가 살던 흑석동 부근에 방을 얻어 혼자 자취했다. 새로운 한글 성서 번역을 담당하고 있던 문익환 목사가 데려다 교정직을 주어서 겨우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에 문단의 일을 보기보다는 주로 문화패들을 만나던 때였다. 일은 아직 자잘했지만 무엇보다도 현장감이 넘치는 일들이었고, 기독교회관의 기도회에 모여 성명서를 낭독하는 재야식 집회보다는 그쪽이 내 취향에도 맞았다. 젊은이들은 서로 '전위냐, 현장이냐'하는 식으로 소수의 비합법 조직으로 싸우는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중과 함께 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의가 많았다. 나는 물론 작가인 데다 문화패이니까 후자의 길이 마음에 들었고 내가 집필 중이던 '장길산'의 기본 줄거리와도 걸맞은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딘가 농촌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무렵이었는데 우연히 양성우와 술집에서 만났다. 여럿이 함께 있다가 내가 남도 쪽으로 이사 갈 예정으로 여행을 떠난다니까, 양성우가 둘이서만 한 잔 더하자고 제안했다. 포장마차에 앉아 몇 잔 하다가 그가 긴장한 얼굴을 내 귓전에 기울이더니 말했다.

- 그래 전라도로 이사 가면 내 몫까지 잘해라.

- 뭐야, 죽는 것두 아니구 비장하게….

- 사실 나 구속될 거야.

그는 얼마 전에 일본에서 왔던 어느 교수에게 그가 쓴 시 '겨울공화국'을 내주었다며 말했다. 내용으로 보나 해외 잡지에 실린다는 괘씸죄로 보아 구속될 것이 뻔했던 것이다. 나는 나중에 팔십 년대에 일본에 가서 와다 하루키 교수를 비롯한 '일한연대위원회'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총무인 다카사키 쇼지와 알게 되었고 같은 또래라 친구가 되었다. 다카사키 교수가 그의 시를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나오는 세카이(世界)지에 실었고 양성우는 즉각 구속되었다. 내가 해남으로 이사 간 직후의 일이다. 다카사키와 그의 부인 이순애는 팔십 년대에 내 소설집과 백낙청의 평론집들을 번역했는데, 특히 그는 내가 일본을 거쳐서 방북 귀환을 하는 소란 중에도 묵묵히 나의 일을 거들어 주었다.

나는 아내와 전라도로 낙향하는 문제를 의논했다. 그렇지않아도 친구가 많은 터에 수많은 날들을 사람에 둘러싸여 지내는 것이 걱정스럽던 아내는 장길산의 집필을 위해서도 우리가 시골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응낙했다. 내가 먼저 남도 쪽으로 내려가 한바퀴 둘러보며 거처할 곳을 찾기로 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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