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6)제79화 육사졸업생들(249)|생도2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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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생도2기를 일컬어 흔히 「비운의 기」, 심지어는 「죽음의 기」라고 부른다. 나 역시 육사를 거쳐간 많은 기가운데 가장 불행했던 기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생도2기를 든다.
28대1이라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4년과정의 정규 사관생도로 입교했으나 입교24일만에 6·25가 터져,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생도신분으로 전투에 참가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더구나 훗날 육사의 기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생도2기만이 유일하게 빠져 10기(생도1기)와 11기(정규 육사1기)사이에서 미아가 되고 말아 「비운의 기」로 일컬어지고 있다.
1950년 6월1일, 이 민족에게 천추의 한을 남긴 6·25를 불과 24일 앞두고 생도2기생들은 부푼꿈을 안고 4년과정의 정규 사관학교에 당당한 모습으로 입교했다. 2기생부터 4년제가된 것은 당시 군수뇌부와 학교당국이 생도1기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얼마쯤 자신감을 얻어 생도1기때 중도에서 좌절됐던 4년제 교육을 기어이 앞당기겠다는 각오로 49년11월 생도2기를 모집하게 된 것이다.
당시 도하각신문에 실린 「등2기육군사관학교 생도모집」공고에 따르면 지원자격은 49년12월 현재 만19∼23세사이의 장정으로 중학교(신제6년)이상의 학력소지자로 ①졸업후 이학사의 학위를 수여하고 ②미국유학의 은전을 준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미국유학이 젊은이들의 선망의 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졸업후 미국유학 은전」등의 공고를 본 젊은이들이 대거 몰려와 생도2기의 경쟁률이 한층 높았고 우수한 엘리트들이 많이 모이게 된 것이었다.
49년 12월22일부터 시작되어 50년1월l2일에 끝난 시험은 서울의 육본을 비롯해 대전의 2여단, 대구의 3여단, 광주의 5여단, 원주의 6여단둥에서 치러졌다.
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전국에서 1만3천여명의 젊은 학도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4백49명만이 합격되었으니 입학이 바늘 구멍격이었다.
임교생들중에는 학생연안등에 가입하여 반공운동을 벌였던 철저한 방공주의자들이 많았고 지명인사들의 자제들이나 친척들도 상당수 있었다. 시인 변영노씨의 아들 변공수(예비역·중위·「6·1 동기회」회장·한국투자금융사장), 당시 소령으로 육사에서 군제학을 가르쳤던 조병일씨(14대법무장관)의 동생 조병봉(예비역소령·국민당소속국회의원), 박영석장군 (예비역준장·방림방적고문)의 동생 박경석, 이한림장군(예비역중장·14대육사교장)의 처남 송창뇌(예비역대위·한미병원서무과), 원용덕장군(2대육사교장)의 아들 원창희(예비역준장·한국마사회이사), 장도영장군 동생 장도민(예비역중령·재미)생도등도 들어 있었다.
시험은 1월에 끝났으나 6월에야 입교를 하게된 것은 4년과정의 교재가 완전하게 준비되지 못한 점도 있었으나 당시의 학제가 5월졸업이어서 육사도 이에 맞추기 위해 취해진 조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뭏든 치열한 경쟁률을 뚫은 4백49명의 합격자들은 육본특명 제152호(1950·5·29)에 의거, 가입교 형식으로 50년6월1일 상오10시 육군사관학교 강당에 집합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소양시험이라는 또 하나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험에서 소수의 성적불량자와 만22세가 넘은 이른바 고령자등 1백19명이 탈락됐다.
이렇게해서 6월5일 3백30명만이 어려운 고비를 몇차례 넘어 생도2기로 최종 합격되었다.
최종 합격의 영광을 안은 주인공들은 기쁨에 넘쳐 어쩔줄을 몰랐으나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만했던 조국의 운명이나 며칠후 들이닥칠 비극의 6·25를 전혀 알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고침>
8월19일자(일부지방20일자)「10기생의 현주소」기사중 농협중앙회이사 표성순씨(준장 예편·훈련단장)는 배성순씨의 잘못이기에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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