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통장」예금|돈 받을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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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상은 혜화동지점사건을 계기로 이른바 「수기통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들 한번쯤 자신의 예금 구좌를 떠올려봤을것이다.
상은은 김동겸 전대리가 은행원장에 기입없이 변칙적으로 발급해준 통장에 대해 어느정도 지불책임이 있는가.
상식선에서 『어쨌든 은행통장인데 지급해 주어야한다』 든가, 『결국 사채놀이인데 안 내주면 대수인가』 하는 판단을 무심코 내릴수는 있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번 사건에 국한된 처리로서 만이 아니라 이 문제는 자칫 은행의 공신력에 돌이킬수 없는 큰 상처를 입힐수도 있고 또 앞으로 다시 일어날지도 모를 같은 유형의 금융사건에 대해 중요한 전례로 남기때문에 당국과 은행은 무척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금융계뿐 아니라 은행통장을 갖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 미묘한 난제를 풀어보자.
우선 이번 수기통장문제를 ▲결국에는 법원이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수밖에 없는 철저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을 하느냐 ▲아니면 사회적인 충격, 은행의 공신력, 도의적 책임등을 고려한 정책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느냐에 따라 처리절차나 방법은 크게 달라진다.
18일 강경식 재무부장관의 발표나 상은의 공고내용(일단 신고를 받은후 각각의 경우가 「정상적인 예금거래인지 아닌지」 를 가려낼때까지 예금지급을 보류 한다는 내용) 으로 미루어 보면 당국이나 은행은 일단 전자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듯 하지만 아직 최종 방침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만일 철저하게 법의 테두리안에서 해결을 한다면 어떠한 기준에 의해 판단이 내려져야할까.
이경우 가장 중요한 판가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예금주가 변칙적인 사채거래인 것을 알면서 상은 혜화동지점 아닌 김동겸대리를 믿고 김대리를 상대로 예금을 했는가 하는 문제.
이같은 질문에 『그렇다』고 선선히 수긍하는 예금주는(물론 별로 없겠지만)법의 어디에 호소해도 원장에 기입안된 자신의 예금을 상은으로부터 찾을 길은 없다.
바꾸어 말해, 이번 사건의 경우 법적인 해석에서 보면 수기통장을 가진 예금주와 상은의 「거래」 는 ①「상업은행 에서 공금리 이외의 별도 이자를 더 붙여주기로 한 계약(이 경우 상은은 원장기입이 없어도 지급책임을 진다) ②상은에 「정상적인 예금」 을 해주면 그 댓가로 명성이든 김대리든 중개인이든 제3자가 별도 이자를 주기로 한 계약(이때도 상은은 지급책임을 진다) ③비록 김대리가 상은의 직원이긴 하지만 예금주가 「은행」이 공식적으로 모르는 「부당거래」라는것을 알면서도 개인 김동겸을 믿고「김대리를 상대」로 한 계약(상은은 지급책임이 없다) 등 3가지 경우 중 어느 한가지에 속할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은행이 신고를 받은후 정상·비정상거래를 가려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는것은 바로 위 3가지 경우중 어느것인가를 가려내겠다는 것이다.
은행은 당연히 모든 거래를 될수룩 ③의 경우로 해석해 손실을 줄이려할것이고 예금주들은 ①또는 ②의 경우를 주장해 자신의 돈을 찾으려 할것이다.
어느 한쪽도 끝까지 승복을 않는다면 결국 법원이 판결을 내릴수 밖에 없으므로 자신의 경우 만큼은 예금을 돌려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억울한」예금주는 판사앞에서 자신의 거래가 ③의 경우가 아니고 ①또는 ②의 경우임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길밖에 없다. 쉬운것 같지만 몹시 어려운 일이다.
만일 예금주가 「공금리란 무엇인가」 「정상적인 은행거래란 어떤 것인가」 「나에게 별도의 이자를 건네주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하는 사람인가」 등등의 판단을 내릴수 있을 만한 학식과 경력·지위·재산등을 갖고있는 사람이라면 재판에서 불리하다. 예금주가 전·현직 은행원이거나 널리 알려진 전문적인 사채꾼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예금을 받은 장소도 중요한 문제가된다. 은행창구에 냈다면 몰라도 다방등에서 대리를 만나 건넸다면 예금주는 결정적으로 불리하다.
또 만일 법정에서 『당신, 그러면 결국 김대리 믿고 거래한거군요』 와 같은 은행측 변호인의 질문에 『그렇소』하고 대답했다가는 예금을 포기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극단적인 경우 은행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일자무식의 예금주가 법정에 선다면 그는 결정적으로 유리한 입장이 된다.
이번 사건의 경우 「상은 혜화동지점에 예금을 하면 프리미엄을 주겠다」는 중개인의 소개로 김대리나 명성은 알지드 못한채 기껏해야 예금유치를 위한 프리미엄이겠거니 생각하고 거래를 한 사람들이 상당한 숫자인것으로 알려져있어 이들에 대한 판결이 어떻게 내려질지는 두고 볼일이다.
물론 소송을 않고 스스로 예금을 포기하는 사람도 나올터인데 이 경우는 결국 그만큼 은행의 부담이 줄어드는 셈이다.
한편 이제까지의 각 경우와는 달리 법적인 절차를 떠나 정책적인 차원에서의 결정이 내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상은이 예금주 전부 또는 일부(가령 누가 보아도 확실한 사재꾼이거나 기업주· 은행원· 전현직 공무원등을 제외하고)에게 예금을 지급해주는대신 김대리가 잡아놓고 있는 명성의 담보물을 양도받아 명성에 대한 채권을 행사하는 길이 있다. 이때는 상은이 명성의 가장 큰 채권자가 되므로 명성은 상은의 관리하에 들어갈 공산이 짙어진다.
한편 만일 상은과의 소송에서 지고도 예금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예금주는 다시 김대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어 역시 법의 판결을 받아야한다. <김수길기자>

<.대형사건 처음이나 몇차례 선례있어>
드문것 같지만 이번사건과 같은 경우는 몇있었다. 다만 1천억원이 넘는 규모의 예금이 걸린 대형사고는 이번이 처음이라 지금까지의 사건이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가장 최근에는 김상기사건과 관련, 정당한 예금주임을 주장하는 김규배씨와 조흥은행간의 소송이 아직 판결이 안난채 1심에 계류중이다.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은행측이 승소했다.
지난68년 모은행과 10여명의 전주가 당시 화폐단위로 약1천만원 가까운 「변칙예금」을 놓고 재판을 벌였는데, 당시 전주들은 은행 대리로부터 사채이자와 함께 원장에기입 안된 당좌계정 입금증만을 받고 돈을 맡겼었고 결국 법정은 여러가지 상황으로보아 「부당한 거래」이므로 은행은 지급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최근 역시 모은행 용산지점의 대리가 전주에게 무통장입금증만을 주고 5천만원의 예금을 받아 이를 빼돌린뒤 달아난 사건으로 전주와 은행간에 소송이 벌어졌는데 법원의 전주측 승소판결직전, 은행측 변호인의 이의신청으로 판결이 연기된 경우가 있었다.
역시 각각의 경우마다 모든 정항을 참작해 정당한 거래냐 아니냐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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