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25와 이승만대통령<38>-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만에 공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0월8일.
「로물로」씨가 기본스 휘장을 받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로물로」씨에게 축전을 보냈다.
대통령은 오전에 김광섭 고재봉비서를 대동하고 서울 시민들의 생활상태와 복구작업 상황을 돌아본후 서울시청에 들러 이기붕시장으로부터 시정보고를 들었다.
서울시에서는 시민의 월동용 연료를 마련하고자 부심하고 있는데 토탄을 다량으로 확보할 것을 검토중이라고 하며 폐허지구에 무허가 건축을 신축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배전선 정비와 수리를 서두르고 있어 곧 전기사정이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이화장도 할퀸자국>
서울시의 전재민 구호식량에 대해서는 뉴질랜드와 필리핀에서 원조해준 식량 5만t이 이미 인천에 도착해 있는데 군용물자수질이 긴급한 관계로 반입이 다소 늦어지고 있지만 민간트럭을 동원하여 식량 자유 반입을시켜 이 애로를 해소시킬 대책을 강구중이라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가능한한 모든 대책을 강구하여 서울시민의 식량해결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쌀값을 걱정하는 대통령에게 서울시장은 현재 구호미만으로는 시장쌀값을 조절하기가 곤란하므로 각자가 시외에서 쌀을 반입해올수 있더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은 구보건장관으로부터 유엔에서의 2백50만달러에 달하는 구호의약품과 수백억원에 해당하는 예방주사약·DDT가 인천항으로부터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보건장관은 우리 보건당국과 「밀스」씨가 이끄는 유엔의료후생단이 유엔군의 협조를 얻어 의료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제부터오는 14일까지 시민전부가 예방주사를 맞도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우리 가화장이 위치하고 있는 낙산에서도 공산당원들이 달아나기전에 학살한 80서구의 민간인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김장흥총경이 보고했다.
이화장은 큰 피해는 없지만 괴뢰군들이 들어와 장독을 깨뜨리고 정원에 서있는 대리석 선녀상의 목을 꺾고 팔목을 부러뜨리는등 행패를 부리다 가버린 자취가 역력하다는 것이며 뒷동산에서 다수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어제부터 국회가 열리고 있다고한다. 대통령은 오늘 외국기자와 만났는데 남북한을 통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할 것이냐는 질문을했다.

<포근한 마음씨 흐뭇>
대통령은 유엔은 우리나라가 탄생하는 것을 감시한바 있고 우리의 선거는 우리의 요청에 따라 유엔이 감시한 결과 전적으로 합법적이며 공평한 것임을 판단했고 우리국회는 1백석의 빈자리를 유엔이 북한에서 자유선거를 감시할수 있을때까지 남겨두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대통령은 이어 이와 같은 시기는 이제 급속히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우리정부는 북한각도의 지사를 임명하고 그부임을 준비하고 있다. 대통령은 얼마전 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었었다.
나는 점심식사후 쉴틈도 없이 책상에 앉아 외국으로 보낼 전문과 편지들을 타이프하느라고 바쁜 오후를 보냈다.
한창 편지들을 차례로 타자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장미꽃 한송이가 휙 날아들어 내앞의 타이프라이터 위에 떨어졌다.
깜짝놀라 창밖을 내다보니 대통령이 저편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다. 이 와중에서도 잊지 않고 한송이 꽃을 던져주는 대통령의 포근한 마음씨에 나는 행복감에 젖었다. 16년동안 결혼생활을 통해 대통령은 나에게 단 한번도 돈을 주고산 선물을 한일이 없다. 그러나 한송이 꽃이나 한개의 사과같은것을 나에게 주더라도 그 경우에 따라 방법이 신기롭고 걸맞아 나를 한없이 즐겁게 해주곤한다.
나와 결혼할 당시만해도 한국의 민족지도자가 서양여자와 결혼한다는데 대해 독립운동하던 동지들이나 대통령을 지지하던 동포들에겐 실망과 반발이 대단했었다. 설상가상으로 나의 신랑의 호주머닌는 비여있었다.

<동반말고 혼자 오라>
결혼비용은 모두 신부인 내가 부담했었고 심지어 내 결혼반지도 나의 친정식구들이 알았다면 기절하겠지만 내돈으로 샀었다.
다만 대통령은 언제부터인가 호주머니속에 넣고 다니던 녹두알만한 제주도산 진주알 한개를 결혼선물로 나에게 줄수 있었다. 나는 그때 그것으로 반지를 만들어서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데 경사스러울때나 파티에 갈때만 낀다.
결혼후에도 외국여자인 나를 아내로 맞은 대통령의 어려움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결혼직후 하와이 교포들이 대통령을 초청했는데 대통령의 독립운동 동지들이 서양아내는 동반하지 말고 혼자만 오라는 전보를 두번이나 보내와 나는 남몰래 많이 울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때 하와이여행에 나를 동반해 주었다. 하와이에 가까와지자 대통령은 배위에서 나더러 이번에는 우리를 환영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만 다음에는 다를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가 하와이에 도착한후 우리를 맞아들인 동지회에서 우리를 위해 열어준 피로연에는 1친7백여명의 동포들이 모여들어 당시의 한인집회사상 가장 큰 잔치가 되었었다.

<뜻밖의 환영에 놀라>
그날 이토록 많은 동포들이 모이게 된데는 우리 부부를 환영하겠다는 따뜻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서양인 신부인 나에게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더 컸을 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한국인의 아내로서 한국과 한국인을 내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게이」장군과 「퀸」장군이 무공훈장을 받게된것이 기쁘다.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일본에있는 우리 동포들이 상이장병들을 위해 보내준 의류와 통조림과 비누등 1만상자가 도착했는데 수송방법을 강구중이라고 사회부장관이 보고했다.
수송트럭이 부족해서 서울시에서는 구호미를 반입하는데 인천에서 우마차까지 동원했다고 사회부장관은 대통령에게 수송방법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대통령은 사회부장관과 상이장병들의 현황과 활로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