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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바오 내밀한 얘기까지 … " 어느 정상이 속내 말하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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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는 북·중 관계 변화의 순간과 남북한 비선(秘線) 접촉이 현미경처럼 자세히 기술돼 있다.

 지금까지 북·중 관계는 박근혜 정부 출범 직전인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을 계기로 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회고록에 따르면 이보다 3년도 더 전인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 때 이미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 채택을 반대하는 등 중국이 북한을 감싼 것으로 비춰졌지만 중국 지도자들의 속내는 달랐다고 적혀 있다. 천안함 폭침 한 달 후인 2010년 5월 제주도 한·중·일 정상회의에 참석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중국은 누구도 비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 직후에도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남북을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했다. 다이빙궈는 당시 평양에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남북 간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란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이는 제3국의 북한 침략 시 중국의 자동 군사개입 등이 명시된 ‘조·중 우호조약(1961년)’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고 명시했다

 남북 비선라인의 활동과 북한의 뒷거래 요구도 드러났다. 김기남 노동당 대남 비서가 김정일의 ‘정상회담’ 메시지를 전달해온 것을 비롯해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임태희 노동부 장관 라인, 김숙 국정원 1차장-유경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라인, 김숙 유엔대사-신선호 유엔 주재 북한대사 간 뉴욕채널 등 남북이 가동한 비선들이 적시됐다. 회고록에 따르면 북한은 연평도 도발 중에도 비선 접촉을 통해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하며 쌀과 비료 등 대가를 요구했다.

 문제는 정상 간 대화와 남북 비밀 접촉 등 공개돼선 안 될 전 정부의 대북·외교 비화가 드러나 현 정부 외교안보 부처들이 난감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당시 남북관계나 대중국 외교 실무를 맡은 인사 중 다수는 지금도 핵심인력으로 일하고 있다. 통일부는 겉으론 “전직 대통령 회고록에 대해 정부가 언급하는 건 적절치 않다”며 선을 그었지만 “향후 대북 협상 전략 등을 수립할 때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불만들이 적지 않다. 통일부의 한 인사는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당황해하기는 외교부도 마찬가지다. 한 외교부 당국자는 “회고록에 등장하는 인물 중 아직 현직에 있는 사람도 있고, 은퇴했더라도 여전히 정치적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이 있는데 내밀한 이야기가 너무 많이 공개돼 불쾌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난감해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기밀 취급 인가를 받은 간부들이 퇴임 후에도 말조심을 하는 이유는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 많기 때문”이라며 “자신이 한 이야기가 불과 3~4년 만에 공개된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이 우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전문가들도 북한과의 비선 접촉이나 중국과의 내밀한 이야기가 여과 없이 드러난 데 대해 전략적 부담을 우려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회고록에서 공개된 내용이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을 뒷거래를 요구한 북한에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현 정부의 남북회담 추진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특히 전략적 인내 속에서 조용히 이뤄지는 ‘평화적 이행(북한의 변화 촉진 전략)‘ 전략을 공개해 버려 전략적 선택지도 좁혀 버렸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 외교안보 부처 고위관료는 “비선 접촉 과정을 다 드러내고 ‘북한과의 대화가 의미 없다’고 해 버리면 현 정부가 접촉할 여지가 없어지지 않느냐”며 “비망록의 형태여서 중국 등이 대놓고 문제를 제기하진 않겠지만 내심 황당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원엽·안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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