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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6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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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아내는 장녀 여정이를 낳았다. 나는 지금도 호준이가 어쩌다 그때 얘기를 하면 묵묵히 듣기만 한다. 가장은 들어오지 않는데 진통이 시작되었다. 호준이는 아직 세 살배기 어린것이었다. 다급해진 아내는 셋집 마당에 울고 있는 녀석을 그냥 두고 주인집 아주머니와 택시를 타고 수유리 입구에 있던 산부인과로 갔다. 입원비는커녕 생활비도 거의 떨어져 가던 무렵이었다. 큰누이에게 전화를 했고 누이 내외가 황급히 달려왔다. 호준이는 아직도 당시의 기억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엄마가 갑자기 차를 타고 사라진 뒤에 녀석은 어두워질 때까지 혼자 개천가의 다리 위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온 아주머니가 그제야 병원으로 데려갔고 이미 해산한 제 어미 옆에서 갓난 동생과 나란히 며칠을 보냈다. 나중에 감옥에 가서 하루 온종일을 어두운 독방에서 지낼 때에 자신의 지나간 과거를 세밀한 구석구석까지 되훑으며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럴 때에 몇 번이나 생각나던 것이 이때의 일과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일이다. 나는 내 처자식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고 뭔가 도깨비에라도 홀린 것처럼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해 봄이었을까, 이어령이 그 한두 해 전에 '문학사상'을 창간해 놓았는데 나도 단편소설 몇 편을 발표하면서 그와 인사를 하게 되었다. 이어령은 사람이 찾아가면 주위에 앉혀 놓고 담론을 하기를 즐겼다. 나는 그의 단순하고 솔직한 성격과 다변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돌려서 나의 현실주의적 시선을 비꼬는 적도 있었지만 다른 벗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언제나 내 재간을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버릇은 없지만 잘 쓰는데 어쩌느냐, 라고 했다나. 내가 선배들에게 고분고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면을 바꿀 정도로 의리가 없는 자 또한 아니었다. 그의 잡지에 장편소설을 연재하자는 얘기가 나와서 방문했는데 그때에 나는 한참 '장길산'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익히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한참 듣고 앉았더니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다.

- 그거 중편이나 웬만한 장편으로는 소화하지 못하겠는데.

그러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일보에 귀띔을 해주었던 모양이다. 한국일보 문화부에는 내 또래로 이병일과 백우영이가 있었는데 이들이 부장인 이영희의 질문에 적극 찬동하고 고무했다고 하는데, 어쨌든 연락이 와서 장기영 사주를 만나러 갔다. 장기영 사주와의 만남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부장과 함께 만나러 갔는데 우리가 회장실로 들어가니 장기영은 누군가에게 큰소리를 질러대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나는 뒷전에 말뚝처럼 뻣뻣이 섰고 부장이 말없이 인사를 하자 그는 앞의 소파를 손짓하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도 이제는 중늙은이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청년기에 나는 높은 사람이건 나이 든 사람을 거의 어려워하지 않았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한다는데, 나는 그야말로 일찍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성장 과정이 순탄했다면 뭔가 품행이 방정한 체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했을 테지만 진작에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싸가지'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나다, 당신은 누구냐 하는 태도가 얼굴에 씌어 있었을 것이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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