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뇌신경 환자, 천재화가로 거듭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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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과학자와 예술가의 업적을 정신·신경 이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반 고흐 특유의 화풍을 발작성 신경증후군 때문으로 보는 시도도 그 중 하나다. 사진은 반 고흐의 ‘닥터 가셰의 초상’.

화성의 인류학자
(원제 An anthropologist on mars)
올리버 색스 지음, 이은선 지음, 바다출판사, 439쪽, 1만3500원

갑자기 색맹이 되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대뇌에서 색깔을 인지하는 부분을 다쳐 아무런 색깔도 구분 못 하는 전색맹이 된 I. 그의 눈에 식탁에 차린 성찬은 거무튀튀한 시멘트나 다름없다. 눈으론 빨간 토마토 케첩과 노란 겨자 소스를 구분조차 할 수 없다. 교통신호등을 보는 일도 큰 문제다. 어디 그뿐인가. 찬란한 색깔이 교차하는 일출이나 일몰은 지극히 밝고 어두운 두 가지만 보여 마치 핵폭발 순간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그의 직업은 화가다. 맙소사! 뇌 한구석, 일부 기능이 고장 난 것만으로 인생이 뿌리째 흔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우뚱하기만 했을 뿐 쓰러지지는 않았다. 색각을 잃은 얼마 뒤 그는 신선한 충격을 주며 화단에 돌아왔다. 새로운 흑백그림을 내놓은 것이다. 이제 그는 희미하게 인식하는 조도 차이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색깔을 짐작하는 능력도 개발하고 있다.

이 책에는 I를 포함, 뇌신경 이상증세를 겪고 있는 일곱 명이 등장한다. 영국 출신의 미국 뇌신경학자이자 신경과 의사인 지은이는 이들의 병력을 소재로 인간의 삶을 성찰한다. 그는 뇌신경 이상환자의 현장을 직접 찾아 이들의 독특한 행동과 사고, 적응과 극복 과정을 살핀다. 이를 통해 뇌신경 과학의 세계를 소개하는 한편 인간성의 의미에 대해 애틋한 심정으로 접근한다. 자폐.발작신경증 등 뇌 이상 증상이 빚어내는 독특한 삶의 양식이 소설을 읽는 듯, 영화를 보는 듯 극적으로 이어진다.

동물학자이자 가축시설 디자이너인 템플 그랜딘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다. 어려서 심각한 자폐를 앓았던 그는 사람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은 그에게 영원히 풀 수 없는 '영구미제 사건'이다. 사랑의 개념을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인간 세계를 파악하려고 애쓰지만 고난도 수학방정식을 푸는 것보다도 어렵다. 그래서 자신을 외계인인 지구인의 삶과 생각을 연구하는 '화성의 인류학자'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의 공간 지각력과 기억력은 지구의 어느 장인 못지 않다. 만들고 싶은 기계를 머릿속으로 설계는 물론 시험 가동까지 해볼 정도다. 그래서 이 낯선 지구 사람들로부터 매우 창의적이고 유용한 기술자로 인정받는다.

사실 뇌신경 질환은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커다란 재앙이다. 뇌신경이 손상되면 아주 독특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기이하기도 한 생활 방식이나 내면 세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뇌신경 질환이 재앙만 준다는 선입견에 도전한다. 이런 병이 생활에 한계를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에 소개된 경우처럼 상당수 환자는 자신의 처지를 꿋꿋하게 딛는 것은 물론, 심지어 그 상황의 도움까지 받아 새로운 삶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건 병 자체가 아니라 그 병을 맞는 인간의 자세라는 것이다. 그는 병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를 가지라고 권한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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