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으로 더 나은 삶? 꿈은 별로 안 이뤄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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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별로 안 이뤄진다. 한국에서 안되면 미국에선 더 안된다."

민경복 씨

세계 IT산업의 메카 실리콘밸리. 반도체회사 르네사스에 근무하는 민경복(38)씨는 올해 이민 7년차다. 다양한 주제의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온라인상에서는 필명'클린트(Clint) 민'로 통한다. 특히 근 일년간 인터넷 매체'딴지일보'에 연재한 '반도체계곡에서 살아남는 법'은 이민에 관심있는 네티즌들에게는 상당한 화제가 됐다.

그의 연재 글은 우선 독설에 가까운 제목과 내용으로 눈길을 끌었다.'미국 이민에 환상을 가지려면 오지마라. 여기도 힘들다','교육이 문제라서 떠난다고? 사교육비가 문제라고? 웃기는 소리하지마라','명랑 생활을 즐기려는 사람은 여기 오면 절대 안된다'. 하나같이 미국과 이민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깨는 주제다. 하지만 민씨의 글이 네티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자녀를 둔 한 평범한 이민자가 현장에서 직접 체득한 생생한 이야기를 토대로 썼다는데 있었다.

"괜한 엄살을 떤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기유학이나 이민을 알아보고 있는 분들로부터'그럼 어쩌란 말이냐'라는 원망조의 메일을 받기도 했구요. 하지만 국내에서 너무 이민의 좋은 면들만 부각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크게 이룬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386세대들이 실리콘밸리로 대거 몰려든 것은 90년대말 무렵부터. 외환위기의 여파로 국내 기업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추풍낙엽처럼 잘려 나가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미국에서'인터넷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나스닥 활황으로 벤처기업의 전 직원이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되는 신화가 속출했다. IT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인력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당시 한 통신업체는 현지에서 국내 한 대학 전자과 졸업예정자들을 대상으로 취업설명회를 열고 그자리에서 바로 채용하기도 했다. 2001년까지 한해 1000명 가까운 한국 젊은이들이 대박의 꿈을 품고 실리콘밸리에 정착했다. 이른바'취업이민 광풍'이었다.

민씨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98년 삼성전자 주재원으로 실리콘밸리로 파견 나갔다가"친구따라 강남가는 식으로"그곳에 정착했다. 그러나'기술주 거품'은 허무하게 꺼졌다. 대박의 꿈은 말그대로 꿈으로 끝났고, 산이 높았던 만큼 계곡도 깊었다. 다소 회복됐다고는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아직 침체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더구나 IT의 주도권의 상당부분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로 넘어가고 있다.

"이곳도 많이 변했습니다. 거의 모든 회사들이 첨단부문만 남기고 엔지니어링과 구매 등은 대만.중국.인도 등으로 넘기고 있습니다. 이제 아시아와 연계없이는 독자적으로 생존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죠."

실제로 그가 연재 글을 쓰는 동안에도 몇몇 지인들이 직장을 잃고 귀국하거나 자영업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국 이민을 꿈꾼다. 이들에게 민씨는"선택은 결국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막연한'환상'에 기대서는 안된다"고 조언한다.

예컨대 미국에서도 한국 학벌을 따진다. 한국보다 덜하지만 면접시 1류와 2류 대학, 그리고 외국 대학 출신의 구별은 엄연하다.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통용되는 한국 대학의 등급은 딱 두개라고 전한다. 바로'서울대와 기타대'다.

엔지니어들의 세계에도 출신국.인종에 따른 차별이 있다. 특히 중간 관리자 이상을 꿈꾸는 한국 출신들에게 무엇보다 언어는 큰 장벽이다. 생활 환경도 녹록치 않다. 의료비나 사교육비 부담은 결코 한국보다 적지 않다.'환상적인 나라'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중산층 이상에게만 해당된다.

민씨의 지론은 이렇다. 언어능력이나 인적 네트워크를 감안할 때 이민자들은 평범한 생활을 위해서는 보통의 미국인보다 두배의 노력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네배의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두가지 결론이 나온다."월급쟁이가 힘든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이며"미국에서 성공하면 한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

민씨는 글을 연재하게 된 배경에'이해할 수 없는'한국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한 몫했다고 말했다. 그는"그래도 이공계 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실리콘밸리의 CEO는 거의 이공계 출신이며, 마케팅이나 영업부문에도 이공계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한국도 기술주도형 사회로 갈 것인데 단지 일시적인 현상만 보고 진로를 결정하지는 말라"는 조언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삼성.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의 위상 변화는 실리콘밸리에서 볼 때 더욱 실감난다. 민씨는"이곳에서 삼성은 적어도 메모리와 LCD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다른 모든 업체가 눈치를 볼 정도"라며"인텔과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게 없다"고 말한다. 한국인을 보는 시각도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 대기업 출신이 현지 취업시 제대로 경력을 인정받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요즘은 국내 근무 경력까지 100% 인정받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리콘밸리의 미래는 어떨까. IT업체들이 사라진 자리에 속속 들어서고 있는 BT(생명공학)업체들이 새로운 중흥기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는"무엇보다 아시아에 달렸다"는게 일반적인 분석이라고 한다. 실리콘밸리의 독주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으며 결국 IT의 신흥강자인 아시아와 연계한 생존법을 택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때문에 그는 해외 진출을 계획하는 후배들에게"시각을 실리콘밸리가 아닌 전 세계로 넓히라"고 조언한다. 인터뷰 말미에 털어놓은 자신의 미래설계도 같은 맥락이다.

"저도 이제 승부를 걸 나이가 됐죠. 구체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 2~3년후에는 중국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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