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4) <제79화 육사돌업생들>(207) 장창국 조희석소위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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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거제도포로수용소 경비사령부 작전처장 정태성중위는 육사동기생 용태영소위를 수용소에서 빼돌려 탈출시킨 혐의로 참재16개국과 한국군대표등으로 구성된 합동조사위원회에서 조사를 받았다.
정중위는 조사반에 출두해 군번과 계급만 말하고 그밖의 심문에 대해서는 일제응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명찰을 달고 있는것도 아니고 8만명이 넘는 숫자여서 제대로 관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지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다. 수용소의 점호는 머리숫자만 헤아리는 형식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미군들은 포로점호를 헤드 체크라고 했다. 김가가 이가행세를 해도 알 사람이 없었다.
정중위가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고 1주일을 버티자 조사위원회는 결국 「혐의 무」로 결정을 내렸다고한다.
용소위가 수용소를 빠져나간지 한달쯤후 정중위는 또한명의 생도1기생을 포로수용소에서 만나게 됐다.
그는 조희석소위였다.
조소위도 생도대가 서울을 철수할때 낙오되어 피난민속에 끼어 대구가까이까지 내려왔으나 그만 인민군에 붙잡혔던 것이다.
인민군에 강제로 끌려 낙동강전선에 투입됐던 조소위는 용케도 야밤에 낙동강을 건너 탈출, 러닝셔츠를 벗어들고 미군에 자수 의사를 표시했다.
서투른 영어지만 미군헌병과 의사소통이 이뤄져 한국군에 넘겨진 그는 사관생도 신분이 확인돼 부산에있는 육군본부로 가게되었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대구역에서 기차를 잘못 탔다고 한다. 그가 탄 기차가 포로수용소행인것을 알게 된것은 기차가 삼양진역을 막 통과할 무렵이었다는 것이다. 잠결에 누가 등을 두드리는것 같아 눈을 떠보니 흑인병사가 페인트통을 들고 흰이를 드러낸채 씩 웃고있었다.
조소위외 등에는 이미 PW(전쟁포로)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쓰여진뒤였다. 등뒤에다 지워지지않는 페인트칠을 해버렸으나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조소위로부터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듣고난 정중위는 다시 김도영경비사령관(당시대령·육사1기생)을 찾아가 조소위의 구출을 상의했지만 역시 방법이 없었다.
그즈음 수용소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처음엔 밥만 배불리 먹으면 감사하게 여기던 공산포로들이 서서히 「포로의 인권문제」를 들고 나왔고 수용소 곳곳에 괴뢰기를 달고 수용소가 떠나갈 듯 공산주의 노래를 제창하기도 했다.
그래서 포로들의 성분심사가 시작되고 반공 포로와 친공포로를 분리, 17개의 막사중 73·74·81·82·83·84·91·95·96호 수용소등에는 반공포로를 수용했으며 나머지 막사에는 소위 친공포로가 수용됐다.
특히 66호 막사에는 북괴군 장교들을 수용, 「군관수용소」라고해서 특별취급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분심사도 형식적이어서 출신이 이북이라는 사실하나만으로 친공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도 많았으며 반공포로수용소에는 친공첩자들이 위장해서 끼어든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다.
아뭏든 미군들은 포로들에게 지나칠정도로 인도적이었다.
제네바협정에 의거, 포로들에게 흡족한 식사를 제공해야 한다면서 야채와 쇠고기를 일본에서 실어다주었고, 심지어 부사양간장까지 들여와 공급했다.
그래서 포로들 가운데는 너무 잘먹은 덕분에 한동안 설사병환자까지 발생했었다는 것이다.
당시 프로들의 하루 급식 기준열량은 2천4백 칼로리였다고 들었다. 포로수용소를 경비하던 우리 병사들은 그때만해도 꽁보리방에 소금국으로 식사를 할때였다.
이야기가 약간 옆길로 들었지만 조소위는 결국 거제도수용소를 탈출하지 못하고 그해 10월 영천으로 다시 이송되었다가 53년 반공포로석방때 겨우 자유의 몸이되어 군에 복귀했다.
그는 80년 대령으로 예편, 경주부근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다가 작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고 들었다.
어쨌든 포로수용소에서 생도1기생 3명이 마주친일은 「6·25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준 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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