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751)살아있는 전사-제79화 육사졸업생들(20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만3년에 걸친 한국전쟁은 보는 이의 친각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겠지만 북괴가 휴전선을 넘어와 아군이 대전까지 후퇴할 때까지를 서전기로 본다면 생도1기생들이 임관되고 육군본부가 대구로 옮겨가는 동안 이전열을 가다듬는 시기가 아니었던가싶다.
아군의 본격적인 반격작전은 낙동강에 방어전선을 구축하면서 개시된다.
생도1기생들이 소위로 임관된후 전투에 참가하여 세운 전공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본다. 소대단위의 전투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그들 개개인의 전공이 전사에 모두 남아 있을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또 뿔뿔이 흩어져 전선에 투입된 개개인의 무용담을 객관적으로 증거도 없이 나열하기도 어렵거니와 수집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미 기술했듯이 생도1기생들은 임관도 되기 전에 치른 포천지구 전투나 부평리전투, 빙원방어 전투등에서 눈부신 전과를 세웠고 임관후에도 활약상이 대단했다.
생도1기생들 사이에 아직도 『그사람 앞에서는 전투자랑 하지말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바로 「그사람」이 채항석장군(예비역소장·현수산개발공사사장)이다.
채장군은 소위로 임관된후 6사단 9연대 1대대 1중대에 배속돼 낙동강전투(의성·의흥지구)를 시작으로 영천·신령·점촌·양평·화천·금성지구 전투를 거쳐 38선을 넘어 철령고개전투·안변·원산·마식령·성천·순천(평남)·개천·영변·구장·희천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6사단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온정·구장·개천·성천을 거쳐 평양으로 내려왔다가 의정부를 거쳐 충주까지 후퇴했었다.
충주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9연대는 장호원·가평까지 진출했다가 51년7월 용문산전투·지암리전투를 치르고 다시 화천을 탈환했다. 채장군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전사」인 셈이다. 50년 7월하순부터 1년간 매일 전투를 했으니 채장군 앞에서 「전투자랑」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는 영천지구 전투에서 인민군과 백병전을 벌이다 10여m 낭떠러지로 굴러 멀어져만 하룻동안 의식을 잃고 팽개쳐져 있다가 소생했다.
다행히 오른쪽 눈위가 돌에 찔려 움푹 패이는 정도의 상처밖에 입지않았다. 40회이상의 전투에서 실탄 파편 하나 맞지 않은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하겠다.
신령지구 전투에서는 특공대장으로 조림산계곡을 넘어오던 적탱크부대를 기습, 탱크7대를 폭파시키는 무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대전에서 소위로 임관될 무렵 사무착오로 『고향집에는 포천전투에서 이미 전사한 것으로 통보가 내려갔다고 한다. 벌써 죽은 줄 알았던 그가 51년9월 도미유학을 앞두고 귀향하자 『귀신이 돌아왔다』고 동네 어린이들이 피해 달아나는등 야단이 났었다고 한다. 그래서 채장군은 「죽은 채소위」의 군번과 「육군소장 채항석」의 군번등 2개의 군번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생도1기생중 워낙 작전과 부대 지후 능력이 탁월해 중위때 대대장을 지낸 사람도 있다. 20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하고 74년 예편한 조원재대령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조대령은 소위임관후 7사단 3연대 3대대에 있었는데 안강전투를 치른후 북진, 평양까지 진격했다가 후퇴할때 대대장이 전사라자 당시 6사단장이던 신상철장군이 조중위를 3대대장에 임명, 묘향산전투를 지휘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렇듯 생도1기생들은 6·25당시 비록 나이가 어리고 계급이 새까만 소위 또는 중위였지만 중요한 위치에서 선배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선봉에 섰다가 60여명이 또 희생되었다. 전쟁 발발 1년 남짓한 사이에 전사한 55명을 합쳐 모두 1백20여명이 희생돼 총원의 반전 가까운 생도 1기생들이 유명을 달리 한 것이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