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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고르바초프 '레이캬비크 회담' … 제3국 회담이 냉전 종식 출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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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에서 만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총서기. [중앙포토]

2000년 6월 평양, 2007년 10월 평양. 분단 이후 두 차례 열린 남북 정상회담 장소는 모두 평양이었다. 올 들어 3차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이 제기된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이 5월 러시아 방문에 긍정적 신호를 보내면서 남북 정상이 한반도가 아닌 제3국에서 만날 가능성이 열렸다. 전문가들은 “제3국에서 회담할 경우 성과에 대한 부담이 한반도에서 할 때보다 작다”고 분석한다.

 이런 장점을 잘 보여준 사례는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이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이틀간 군비 축소 등을 논의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이유는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중간 지점인 아이슬란드에서 회담을 열자”는 소련 측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두 정상은 정상회담에서 전략핵무기 50% 감축 등 상당 부분 합의를 이뤘지만 미국이 추진하던 전략방위구상(SDI) 때문에 막판에 회담이 틀어졌다. 우주에서 탄도미사일을 격추하는 SDI 폐기를 고르바초프가 요구했지만 레이건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상회담은 결렬됐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었다. 군비 축소에 대한 상대방의 의지를 확인했고, 협상카드도 알게 됐다. 이후 진행된 협상이 훨씬 쉬워졌다. 이듬해 고르바초프가 워싱턴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했고, 핵전력 폐기 조약을 체결했다. 레이캬비크 회담은 냉전 질서 종식을 위한 초석을 마련한 ‘실패했지만 성공한 회담’으로 평가받는다.

 인제대 김연철(통일학부) 교수는 “레이캬비크 회담은 미·소가 서로를 확실한 대화상대로 여기게 된 ‘심리적 터닝포인트(전환점)’였다”며 “러시아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면 다음 정상회담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한 준비 단계로 삼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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