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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둥성 제1서기 때 ‘마음 공략’ 통치로 성장 주춧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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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아버지인 시중쉰 전 광둥성 제1서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흘판된『시중쉰전』. [사진 이매진 차이나]

“대세를 살피지 않는다면 관대와 엄격 모두 잘못이다. 훗날 광둥을 다스리려면 이를 깊이 생각하라.”

후야오방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1980년 11월 막 부임하는 런중이 광둥성 제1서기에게 선물한 구절이다. 쓰촨 청두에 있는 유비와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에 전하는 청 말의 학자 조번의 ‘공심련(마음을 공략하는 대련)’에서 촉(쓰촨)을 월(광둥)로 한자만 바꿔 선물했다. 제갈량은 맹획을 일곱 번 잡았다 일곱 번 놓아주면서까지 마음을 공략했다. 유비의 전임자 유장은 관대한 정책을, 제갈량은 엄격한 법치를 표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마음 공략’이 통치의 기본임을 담은 명 대련이다. 광둥이 개혁개방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공심이 기본이었다. 바로 런중이의 전임자였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친 시중쉰이 광둥 개혁개방에 성공했던 이유다.

“탈주자는 적이 아니다”

“외지로 빠져나가는 군중을 적으로 삼을 수 없다. 그들을 모두 풀어줘라.”

78년 4월 5일 시중쉰은 당 중앙의 결정으로 광둥을 맡게 됐다. 당시 광둥에는 영화 ‘첨밀밀’의 리밍(여명)과 장만위(장만옥)와 같이 홍콩으로 탈출하려는 대륙 청년들이 쇄도했다.

부임 즉시 탈주 현장을 살핀 시중쉰은 광둥성 상무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이렇게 선언했다. “탈주는 ‘적아모순(적군과 아군의 모순으로 외부 모순을 지칭)’이 아니다. 내부모순이다. 홍콩·마카오도 우리 영토다. 군중이 하루하루 살기 힘들어 나가는 것이다. 흐름이다. 도망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 수준을 높이지 않는다면 지금 막더라도 내일 다시 넘어갈 것이다.” 시 주석의 동생인 시위안핑(59)은 지난해 12월 베이징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강당에서 열린 『시중쉰 화보전기』 출판좌담회에 참석해 “당시 부친의 발언 중 일부는 신화통신 기자조차 탈이 생길 것을 두려워해 기록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시중쉰은 표본겸치를 내세웠다. 대증 처방과 원인 제거를 병행했다. 탈주자를 향했던 총을 거두고 민생을 개선해 민심을 공략했다.

78년 7월 시중쉰은 지금은 선전시로 탈바꿈한 바오안을 시찰했다. 홍콩과 마주한 샤터우자오에 서서 장벽을 사이에 두고 황량한 중국과 번화한 홍콩으로 나뉜 풍경을 보며 상심에 빠졌다. 그는 현 경제 체제로는 광둥을 발전시킬 수 없으니 경제 정책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혈로를 뚫어라”

은퇴 후 광둥성 선전에서 생활한 시중쉰을 찾은 시진핑 주석 가족이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시중쉰은 선전·주하이·산터우에 ‘무역합작구’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덩샤오핑에게 직접 보고했다. 명칭은 미정이었다. ‘수출가공구’는 대만의 경제개발 지역과 이름이 같고 ‘자유무역구’는 자본주의 색채가 너무 강했다. 덩샤오핑은 “특구가 좋겠다. 산간닝(산시·간쑤·닝샤) 소비에트도 처음에 특구라 불렀다”라며 “단 중앙은 돈이 없다. 정책은 줄 수 있다. 자네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혈로를 뚫으시오”라고 말했다. 7월 15일 당 중앙은 중국경제특구 설치를 담은 50호 문건을 발효했다.

시중쉰은 스물한 살 젊은 나이에 산간닝 정치특구를 만들어 다스렸다. 36년 마오쩌둥의 홍군을 받아들여 대장정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말년에는 경제특구를 만들었다. 신중국을 위한 혈로를 두 차례 뚫은 셈이다.

“후임에 간여 안 해”

베이징으로 돌아가기 직전 시중쉰은 간부를 소집해 세 가지를 약속했다. “첫째, 재임 없는 직무 교대다. 당시 당 중앙은 부친의 광둥성 제1서기 겸임을 고려했다. 부친이 동의하지 않았다. 둘째, 광둥 업무에 간여하지 않았다. 셋째, 귀경 5년 이내에 광둥성에 가지 않았다. 이유는 후임자 린중이 서기, 량링광 성장이 맘껏 일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서였다.” 시위안핑이 회고한 아버지의 ‘약법삼장’이다. 이후 광둥에서는 전임자의 정치 간여가 사라졌다. 시진핑 주석은 2012년 총서기 취임 후 첫 시찰지로 아버지의 얼이 서린 광둥을 찾았다. 이듬해 시 주석은 후진타오 전 주석의 ‘나퇴(맨몸으로 물러난 것)’로 당·정·군 전권을 장악했다.

신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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