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6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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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화패 젊은 것들이 우이동 전셋집으로 찾아 왔는데 대접할 것이 변변치 않아 아내가 국수를 사다가 삶아서 비벼 주었다. 김석만이는 지금도 그 시냇가 바위 위에 발벗고 앉아서 비빔 국수를 먹던 얘기를 한다. 김민기나 석만이.채희완 등등은 모두 졸업생이거나 대학원생이었지만 그 아래 또래들은 학생들이었다. 이를테면 연성수.황선진.박인배.박우섭.유인열.유인택 등등인데 그때 채희완 등에게 한 끗발 눌리더니 지금도 어디 가서 모이면 후배 노릇에 성실하다. 팔십 년대 초반으로 넘어가면 전국 서른세 개 지역에 문화패들이 생겨나 전국적인 조직으로 재편성하게 된다. 나는 처음부터 이들과 만나면서 꿈이 있었다. 이미 라틴 아메리카라든가 아시아에서도 특히 필리핀의 현장 문화운동은 잘 알려진 편이었고 전쟁 중인 베트남의 해방전선 초창기의 무장선전대 활동은 책자로 나와서 돌아다녔다. 우리는 우선 대학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문화패가 대학과 노동.농민 현장을 연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첫 단계는 대학 문화패가 스스로의 운동조직을 갖추는 일이었고, 이들이 현장으로 나아가 일하는 사람들과 연결하여 노동자나 농민 가운데서 문화패의 역량을 갖춘 이들을 묶어내야 하고 현장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다른 지역과 노동현장으로 퍼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나는 '문화운동'의 실천과 이론이 하나의 운동 개념으로 정립될 수 있었으면 했다. 채희완은 대학가에 탈춤패를 퍼뜨리고 그들을 연대 조직으로 꾸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고 김석만.임진택.김민기 등은 연극반 중심으로 창작극 운동이나 우리 전통 연희를 기본으로 한 서사극의 형식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여러 가지 논의에 참여하기도 하고 함께 많은 작업을 해냈다. 언젠가 대학 탈춤패들이 경기도 어름에서 모여 엠티를 하는 날 나도 슬그머니 젊은이들 틈에 끼어 밤을 새웠다. 토론하고 술 마시고 장기자랑도 하고 몇몇 패거리는 준비한 탈춤의 몇 개 과장을 공연하기도 했다. 거기서 이를테면 뒷전에서 연희패의 모갑이 노릇을 하고 있던 신동수를 채희완이 나에게 소개했다. 신동수는 나중에 원혜영과 함께 그의 부친 원경선 목사의 '풀무원 공동체'에서 생각과 이름을 빌린 '풀무원' 창업에 참여한다. 신동수는 입이 무겁고 동작도 느렸지만 뒷바라지는 매우 확실한 일꾼형이었다. 그 역시 김근태.손학규.조영래와 고등학교 동창이다. 채희완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재수인가 삼수를 했는데 그야말로 야간 중의 야간이었다. 그는 이를테면 나와 나중에 만나게 되는 김근태나 윤한봉이나 이해찬처럼 내가 칠팔십 년대에 만났던 몇몇 확실한 일꾼들 중의 하나였다. 그 무렵에 김석만이는 나의 '돼지꿈'을 창작극으로 무대에 올렸고 임진택은 그 각본을 토대로 현장 마당극을 만들어 산동네에 가서 그곳 주민들과 함께 공연했다. 특히 임진택의 현장 작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었다. 어느 공장 뒷마당에서의 이애주의 춤은 그저 석유 횃불뿐인 조명이었는데도 힘차고 아름다웠다.

그해에 앞에도 나왔듯이 민청학련 사건 등이 차례로 터지더니 검거된 김지하.이철 등에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나중에 무기로 감형이 되기는 했지만 대단한 서슬과 엄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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