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2) <제79화 육사졸업생들>(195)장창국|한강인도교 폭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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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8일새벽2시30분. 서울 남쪽에서는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았다.
한강인도교가 폭파된것이다. 진지에있던 생도들은 의아해했지만 무슨일이 생겼는지도 알길이 없었다. 한강인도교 폭파계획은 27일상오11시 긴급소집된 육군본부 참모및 재경부대장회의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채병덕참모총장의 내시에 따라 계획을 세운 공병감 최창식대령이 이자리에서 처음으로 설명한 한강폭파계획은 『적이 서울시내에 돌입하면 2시간뒤에 전교량을 동시에 폭파한다. 지금의 전황으로 미루어 폭파예정시간은 하오4시께가 될것이다』는 것이었다.
이 설명을 들은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대령과 2사단장 이형근준장등은 『시민이 피난할 시간적 여유가 너무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으나 총장은 최대령에게 거듭 완벽한 폭파준비를 명령하고 『만약 실패하면 총살에 처한다』는 엄명까지 덧 붙였다.
회의가 끝나자 채참모총장은 육군본부의 서울철수를 극비에 붙이도록 지시한뒤 하오1시쯤 육군본부의 시흥철수를 명령했다. 육군본부에는 참모부장 김백일대령과 장도영정보국장, 그리고 정보·작전국 요원들만 남게 되었다. 물론 신성모국방장관도 이날하오2시께 수원으로 내려가 수원역장실에 임시장관집무실을 차리고 있었다.
육군본부의 철수와 한강인도교폭파계획은 한강북쪽에서 싸우던 모든 부대는 물론 미군사고문단에도 통보되지 않았었던 것이다. 육군본부가 시흥으로 옮긴것을 뒤늦게 알게된 미군사고문단도 황급히 서울을 떠나려던 순간 동경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긴급전문을 받았다한다.
「맥아더」원수가 주한미군의 작전권을 부여받고 전방지휘소를 파한중이며『곧 중대한 결정이 었을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미군사고문단장대리 「라이트」대령은 그길로 채병덕참모총장에게 달려가 이사실을 알리고 육군본부의 서울 복귀를 요청했다. 이에 힘을 얻은 육군본부는 다시 서울을 고수하기로 작전지도방침을 변경하게 되었고 일단한강인도교와 광진교 폭파계획은 보류되었었다.
그러나 27일하오 창동저지선이 무너지면서 수도서울은 바람앞의 등불격이 되었다.
적은 27일하오5시께 전차와 기마병을 앞세워 미아리를 넘기 시작했고 28일새벽1시께에는 길음교를 넘어 무인지경으로 시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새벽1시45분께 채참모총장은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적전차가 시내로 들어와 돈암동을 거쳐 동소문으로 향하고 있다. 즉시 한강으로 가서 한강교를 폭파하라. 나는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간다. 곧 실시하라』고 한강 인도교폭파를 다시 명령했던 것이다. 이때는 누구의 제지도 받을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화를 끊고 육본 현관으로 나오면 채총장은 우리들에게 『내가 이대로 서울을 떠날수 있겠는가』면서 머뭇거렸다. 김백일참모부장이 『사후조치는 우리에게 맡기고 속히 피신하십시오』면서 그를 떠밀다시피해서 지프에 으르게 했다.
한편 총장으로부터 한강인도교폭파명령을 방은 공병감 최대령은 즉시 한강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던 공병대에 폭파를 명했다. 이시간이 28일새벽2시20분께였다.
채총장이 육본을 뗘난 직후 육본에 도착한 5사단장 이응준소장은 김백일대령으로부터 한강교폭파명령이 하달됐다는 말을 듣고 『예하부대가 도강한 이후에 다리를 끊어야한다』고 말했고 지금의 참모차장에 해당하는 김참모부장도 이에 동의, 나에게 한강인도교폭파를 즉시 중지시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나는 작전과장 정내혁중령(전국회의장)과 함께 지프에 급히 올라 한강쪽으로 몰았으나 수많은 차량과 인파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중지도 못미쳐 파출소앞에서 차를내렸을때 『쾅』『쾅』하는 소리가 났으며 히로시마 원폭때 솟아올랐던것같은 버섯구름이 새벽하늘에 치솟아올랐다.
10기생 이야기도중에 느닷없이 한강다리 폭파사건을 거론하게 된것은 워낙 엄청난 사건이고 이때문에 서울시민은 물론, 적과 대치해 싸우던 수많은 장병과 사관생도들이 희생됐기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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