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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1) <제79화 육사졸업생들>(194)정착국|불타는 육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최정훈·권영길·양한근생도에 이어 확인된 전사자수는 만하룻동안에 무려 27명이나 됐다.
경찰대대의 진지에 중기관총을 메고 지원나갔던 한경서생도와 조경래생도는 임무를 끝내고 생도대 진지로 돌아오던중 적의 박격포탄에 맞아 숨졌다.
한·조 두생도는 모두 서울출신으로 한 내무반에서 지냈고 둘다 축구선수였다. 특히 조생도는 경신고 재학시걸 명윙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또 자결한 생도도 있었다. 장만근생도(서울사대부중출신)는 적탄에 우측 대퇴부 관통상을 입고 동기생에게 업혀 후송되는 도중 자신때문에 동기생이 낙오될 것을 염려해 스스로 M1소총을 당겨 자살하고 말았다.
26일 하오4시. 의정부가 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의정부의 함락은 생도들이 더이상 부평리 일대를 사수해야할 의의를 상실케 했다.
하오6시. 육본에서는 생도대의 철수를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부평리전투는 결국 적 3사단이 포천일대를 유린하고 퇴계원을 공략하려다 중도에서 육사생도대에 한동안 저지당해 격전을 치른 싸움터였다. 사관학교로 철수하는 생도들은 심한 허기와 피로에 지쳐 있었다.
생도들은 아군의 정세가 어떤지 전혀 알지도 못했고 철수명령때 당연히 하달됐어야 할 철수순위·철수경로·엄호방법등도 지시된것이 없어 각자의 판단에 따라 산길로, 제방으로 혹은 겁없이 한길을 따라 모교로 향했다.
어떤 생도는 『육사생도에게는 후퇴란 있을 수 없다』고 분노를 터뜨렸고, 『후퇴도 작전이다』며 억지로 자위하는 생도들도 있었다고 한다.
생도들에게는 참담하고 쓰라린 경험이었다. 밤10시께 퇴계원에 도착한 생도들은 트럭에 실려 육사로 돌아와 된장국에 보리밥 한그릇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 사이에 내무반 침대는 빈자리가 더 많아 보였다.
27일 새벽녘에는 창동전방으로 진출하는 적의 포소리가 육사까지 들려 왔다.
생도들은 이날 새벽부터 진지를 다시 구축했다. 지금의 태릉컨트리클럽에서부터 남양주군구리읍갈매리에 이르는 2km가까문 지역에 걸친 방어진지였다.
생도대가 방어진지를 만들고 있을때 부평리에서 낙오되었던 생도들이 하나 둘씩 돌아왔다. 전사한 것으로 알았던 동기생들이 돌아오자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때 학교 연병장에는 전방에서 싸우다 후퇴해온 7사단 장병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준식교장은 피로에 지쳐 연병장에 주저앉거나 드러누운 7사단 장병들을 집합시켜 『신성한 사관학교에 패잔병들로 들어오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군인의 자세를 가다듬어라』면서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준장이 분노한 데는 그런대로 이유가 있었다. 불과 보름전에 자신이 지휘했던 7사단 장병들이 이렇게 힘없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27일 하오4시께 생도들이 진지구축과 우장을 끝냈지만 적 3사단과 4사단은 이미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창동을 지나 수유리로 들어오고 있었다. 만약 적이 미아리까지 내려온다면 생도들의 방어진지도 무용지물이될 공산이 컸다. 퇴계원 쪽으로 척후정찰을 나갔던 생도로부터 퇴주원 가도에 적 기마병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생도들이 바짝 긴장. M1소총을 움켜 쥐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 무렵 미아리쪽 밤하늘에 수십발의 예광탄이 터졌다.
조금후 적은 퇴계원 방면으로부터 곡사포 공격을 시작했다. 밤 10시께는 적이 쏜 포탄이 육사교정에 떨어졌으며 곧 대강당의 지붕이 포격으로 날아갔다.
학교본부는 중요한 서류를 2대의 트럭에 실어 서울로 출발시켰고 학교에 남아있던 생도들은 화염에 싸인 건물 진화작업을 폈으나 조국의 운명처럼 불길을 잡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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