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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의 '덕수'들과 잘 지내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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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준봉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와 비슷한 실제 인물을 최근 알게 됐다. 춘천교대에서 국어과 교수·도서관장 등을 지내다 1996년 정년 퇴임한 올해 여든네 살의 원훈의(元勳義)씨다.

 그는 지난해 말 회고록을 출간했다. 은퇴 후 쉬엄쉬엄 쓰다 보니 6, 7년이 걸렸다고 한다. 책 제목이 재미있다. 『훈이가 넘은 아리랑 고개』(시선사)다. 뜻밖의 애교를 발휘한 이름 ‘훈이’가 발음대로 훈훈한 느낌이지만 이어지는 ‘아리랑 고개’에서는 맵고 시큼했을 인생 역경이 짐작된다.

 책장을 펼쳐 보니 역시 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여덟 살에 수송선에 몸을 실은 43년생 덕수보다 열두 살이 많다. 하지만 모진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또 한 명의 아버지라는 점에서 갈 데 없는 우리 주변의 덕수다.

 덕수, 아니 원 선생은 하마터면 제2차 대전 막바지 일본군의 자살특공대 ‘가미카제(神風) 조종사’가 될 뻔했다. 그가 다니던 지금의 서정리초등학교(경기도 평택시 서두물로)는 당시 5, 6학년생 중 건강하고 성적 좋은 한 명씩을 선발해 서울로 올려 보냈다. 항공학교 입학 후보생이다. 5학년 대표로 뽑힌 그는 난생처음 서울 구경도 하고, 신체검사·구술시험을 치렀지만 체중 미달로 최종 불합격 처리됐다. ‘우에하라’라는 6학년생은 합격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 후 운명은 알 길이 없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0년 말에는 유명한 국민방위군에 소집됐다. 중국의 개입으로 다시 전세가 기울자 정부가 예비병력 확충을 위해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 50만 명을 소집해 변변한 월동대책도 없이 부산 등지로 후송하다 9만 명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참사다.

 삶과 죽음의 차이가 멀지 않던 기막힌 세월을 뚫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원 선생은 행운아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회고록의 감동은 단순히 생존담 서사(敍事)의 박진감에서 오지 않는다. 그 안에는 싱싱한 인생 설계와 쓰라린 좌절, 서늘한 아쉬움, 말년의 뿌듯함 등 다양한 연령대의 ‘훈이’가 녹아 있다. 시인 정현종씨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그린 대로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총합인 인생은 ‘실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 인생 자체를 두고 영화 ‘국제시장’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보수 혹은 진보라는 단순한 꼬리표를 달 수는 없다. 인생은 이념보다 어마어마하지 않나.

 반대로 회고록이나 영화를 원 선생 혹은 덕수 세대 전체에 대한 헌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스스로를 희생해 나라가 이만큼 발전했으니 아버지 세대를 존경해야 한다는 논리는, 양띠 해 수십만 명의 양띠 전원이 행운을 맞게 되리라는 믿음만큼이나 일률적이고 그래서 공허한 느낌이다.

 중요한 것은 분별심 그리고 균형감각이다. 뭉뚱그린 전체가 아닌 구체적인 개별성, 개인에 주목하자. 그게 서먹해진 덕수들, 아버지 세대와 친밀함을 회복하는 길이다. 원 선생 개인의 행적은 존경할 만했다.

신준봉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