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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무혐의로 끝난 'KB금융 잔혹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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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조민근
경제부문 기자

고(故) 김정태 행장, 황영기·임영록·윤종규 회장. KB금융의 전·현직 수장인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고 불명예 퇴진을 한 경험이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추가됐다. 불명예 퇴진의 빌미가 된 제재가 무리했다는 게 뒤늦게 밝혀졌다는 것이다.

 최근 국민은행은 국세청을 상대로 한 법인세 부과처분 취소 소송에서 이겨 4000억원을 돌려받게 됐다. 8년을 끈 소송 과정에서 국민은행이나 정부나 막대한 시간과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이 소모전의 발단을 제공한 건 금융당국이다. 2004년 국민은행이 국민카드를 흡수합병할 때 법인세를 적게 내기 위해 회계 부정을 저질렀다며 김정태 당시 행장과 윤종규(현 KB금융 회장) 재무담당 부행장을 중징계했다. 하지만 1, 2심은 물론 대법원까지 회계 부정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당시 금융권에선 카드 사태로 부실이 쌓인 LG카드를 지원하라는 당국의 지시에 저항한 김 행장에게 당국이 ‘괘씸죄’를 적용했다는 말이 파다하게 퍼졌다.

 지난해 임영록 전 회장에 대한 조치도 과도했다는 게 드러나고 있다. 초유의 경영진 내분 사태에 대한 판단이 ‘중징계→경징계→중징계’로 오락가락한 건 그렇다 치자. 이후 검찰 고발까지 이어진 데 대해선 당국 내부서조차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검사 과정에서 회사는 물론 임 회장의 개인 계좌까지 뒤졌지만 불법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관계를 떠나 중징계의 명분을 쌓고 임 회장의 반발을 제압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용 조치라는 해석이 나왔다. 실제 검찰이 나서 5개월여를 샅샅이 훑었지만 결과는 무혐의 처분이었다. KB금융이 지주사로 전환한 뒤 첫 수장이 된 황영기 전 회장은 우리금융 회장 시절 파생상품 투자 손실이 문제가 돼 2009년 중징계를 받고 KB를 떠났다. 하지만 이후 징계 처분이 부당하다며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승소해 명예를 회복했다.

 같은 일이 두 번도 아닌 세 번 연거푸 일어난 건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설사 우연이었다 쳐도 금융권엔 이미 뚜렷한 각인이 새겨졌다. 잘못이 있건 없건 순순히 당국의 말을 듣지 않거나 맘에 들지 않는 CEO는 언제든지 내쫓길 수 있다는 인식이다. 역대 수장들의 잇따른 낙마에 금융권에선 ‘KB금융 잔혹사(史)’란 말이 회자됐다. 하지만 이를 ‘금융당국 잔혹사’라고 고쳐 불러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금융당국의 무원칙, 무절제는 괘씸죄 남발을 불렀다. 그 과정에서 리딩뱅크였던 KB는 물론 당국에 대한 신뢰도 추락했다. 낙후한 금융산업을 개혁하자며 업계에만 혁신과 보신주의 타파를 외칠 게 아니라 당국 스스로부터 돌아볼 일이다.

조민근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