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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문학 터치] 시인을 키운 달동네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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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달동네에선 일도 많았다. 고철장수 아저씨는 밤마다 아줌마를 때렸다. 기운 센 천하장사 마징가Z처럼 지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그레이트 마징가만큼 막강한 오방떡 아저씨가 나타나 고철장수 아저씨를 흠씬 팼다. 그러나 오방떡 아저씨의 아내는 어느 날 짱가처럼 산 너머로 날아갔다. 골목 어디에서나 황금박쥐처럼 출몰하던 노숙자 박기수씨, 프레스기가 손가락 둘을 먹어버려 왼손으로만 악수하던 '요괴인간' 돼지엄마네 작은형, 2대8 '아톰' 가리마의 땅딸이 이발사도 소년이 살던 달동네에서 살았다.

소년이 사춘기를 거친 곳도 달동네였다. 돌아온 외팔이를 보러 동시상영관에 숨어들었던 중3의 소년은, 침대에서 홀로 뒤척이던 여인의 풀린 눈과 허연 허벅지 드러내며 말달리던 여인의 망측한 포즈가 숨가쁘게 교차하던 장면을 보고야 만다. 그 뒤로 소년은 엠마누엘.차타레.보바리 등 각종 '부인'을 섭렵한다.

권혁웅(38)시인이 회고한 소년 시절은 사무친다. 짐짓 익살스레 표현했지만 소년 시절 그는 외롭고 우울했다. 그러나 좌절은 없었다. 아수라백작에게서 좌익과 우익을, 헐크로부터 안팎의 경계를 배웠다. 산 너머 외계를 종종 무서워 했을 뿐이다. 달동네 소년의 성장통이 시인의 어릴 적 기억으로만 읽히지 않는 건, 그를 지켜준 독수리 오형제가 다른 달동네 소년들도 지켜줬기 때문이다.

그는 문단이 주목하는 신진 주자다. 창비에서 이번 시집을 내자마자, 문지에서 평론집 '미래파-새로운 시와 시인을 위하여'를, 연이어 전세계 신화를 새로이 해석한 에세이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를 문학동네에서 출간한다. 그는 현재 문예중앙 편집동인이다. 1996년 중앙일보에서 평론으로, 이듬해 문예중앙에서 시로 등단했다.

그러고 보면 TV 속 영웅도 고단한 삶이었다. 달빛 아래서만 나다니던 배트맨, 수시로 겉옷 내던지던 슈퍼맨, 뭇 사내의 시선을 견뎌내던 원더우먼, 그들의 험한 팔자에 고개를 숙인다. 그래도 독수리 오형제에 비길까. 화재로 불새가 되어버린 달동네 다섯 남매의 사연을 읽으면서는 끝내 눈물을 떨궜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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