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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닥터의 산실 … 환자에게 사랑받는 의사 만들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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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엄창섭 주임교수가 의대생들에게 가상해부대를 통해 인체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학생들은 실제 해부에서 볼 수 없는 부분까지 확인할 수 있다. [신동연 객원기자]

뿌리를 잘 내린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좋은 환경에서 자양분을 충분히, 골고루 흡수해야 비로소 좋은 의사가 된다. 전통·문화·학풍 등 훌륭한 환경이 좋은 의사를 만드는 토양이다. 의과대학이 의사를 키우는 ‘인큐베이터’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80여 년 전통을 지닌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은 의학교육의 표본이자 ‘굿닥터’의 요람이다. 이렇게 길러진 의사는 국민에게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생명 전선의 첨병이 된다. 중앙일보 ‘건강한 가족’은 새해를 맞아 국내 최고의 의학교육 환경을 갖춘 ‘굿닥터의 산실’을 탐방했다.

국내 의학교육은 그동안 주입식으로 이뤄졌다. 인체의 세세한 구조와 각종 질환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4년 안에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의과대학은 의사국시 합격자 양성소나 다름없었다. 아직도 많은 의과대학이 매년 국시 합격률을 자랑삼아 내놓는다. 지식 습득에만 초점이 맞춰진 탓이다. 하지만 환자가 원하는 의사는 단순히 지식이 많은 의사가 아니다. 첨단 의술을 구사하면서 몸과 마음까지 보듬는 의사다. 의사에게 소양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의대생 장애체험·봉사활동 필수

고대 의대의 한 강의실.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일반 의대 수업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교수는 의학지식 대신 자신의 봉사활동을 비롯한 경험을 얘기하고, 학생들의 질문과 자유토론이 이어진다. 매달 첫째 목요일마다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나눔과 봉사, 역사 바로보기 등 강의 주제에 맞게 강연자도 다양하다.

 의과대학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마련된 의인문학교실 수업이다. 이 ‘생각의 향기’라는 강좌를 통해 학생들은 소통을 배운다. 환자의 아픔을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의료인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고대 의대는 영리보다 봉사와 희생을 중시한다. ‘몸으로 실천하는 참의사 양성’이라는 의대 교육목표와도 맞닿아 있다.

이런 목표는 교육 커리큘럼에 녹아 있다. 인성교육을 교과과정에 포함시켰다. 고대 의대생이면 누구나 2박3일 일정으로 장애 체험과 봉사활동을 한다. 의대생 필수 교과목이다. 의학과 3학년 정현우씨는 “의대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실감했고, 환자의 아픔을 몸으로 이해하고 마음까지 치유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환자에게 참사랑을 실천했던 『그 청년 바보 의사』의 고 안수현씨,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의료봉사를 한 공로로 제1회 이태석 신부상을 수상한 이재훈씨 등 사회공헌 활동에서 고대 출신 의사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가상 로봇수술 등 첨단시설 갖춰

의대 실습이 이뤄지는 본과 고학년 수업. 학생들이 해부대에 모여 인체 구조를 익힌다. 몸을 여기저기 잘라가며 단면을 관찰한다. 다른 실습실에서는 로봇수술이 한창이다. 이 수술 장면은 모니터로 학생과 교수가 모두 공유한다.

 이 모든 상황은 실제가 아니다. 가상으로 이뤄지는 수업이다. 고대 의대가 아시아 최초로 도입한 가상해부센터와 로봇시뮬레이터가 있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과거 해부학은 시체 해부가 전부였다. 가상해부는 미리 해부된 인체를 체험하는 시스템이다. 가상해부대가 구현하는 화상을 통해 신체 곳곳을 가상으로 절개하고 절단면을 뒤집어 볼 수 있다. 학생들은 MRI 절단면에 대한 개념을 상세하게 익힐 수 있다. 실제 해부학 실습에서 얻은 지식을 비교·복습할 수 있는 시설이다.

 로봇시뮬레이터는 로봇수술과 복강경수술을 가상현실에서 연습할 수 있는 장치다. 실제 수술에서 노출되는 위험요소를 사전에 줄일 수 있다. 수술도 리허설을 하는 셈이다. 카데바(실습용 시신) 수술실과 현미경 수술실도 비슷한 개념이다. 마취시설과 멸균시설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병원 수술실과 동일한 환경을 구현한다.

 고대 의대는 지난해 3월 문숙의학관을 완공했다. 의과학연구지원센터를 비롯한 줄기세포실험실·대형연구과제센터·실용해부센터·실험동물연구센터·교수학습지원센터 등 각종 실험실과 연구실을 갖췄다. 고대 의대 류임주 연구교류부학장은 “의대에서는 학생 연구지원 프로그램 등 국가적으로 필요한 연구인력, 즉 의과학자를 키우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며 “이들은 임상 경험과 기초의학교실에서 배운 실험기법을 활용해 중계연구의 핵심 인물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의사면허 취득 가능

한때 의학교육 풍토는 ‘무조건 많이’ 가르치는 것이었다. 평일 하루 8시간씩의 수업에 4시간의 토요일 수업까지 주당 44시간을 꼬박 소화했다. 말 그대로 주입식이었다. 하루 수업량을 짧게는 4시간으로 줄였다. 대신 스스로 실습 기회를 충분히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언제든 이용할 수 있도록 실습실을 개방했다. 고대 의대 박건우 교무부학장은 “의학교육이 주입식에서 벗어나도록 일반 강의를 줄였다”며 “의사로서의 역량을 강화하도록 실습 환경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러한 교육 수준을 인정해 고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는 싱가포르 의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에서 단 세 곳뿐이다.

 우수한 교육환경은 수련 과정까지 이어진다. 안암·구로·안산에 설립된 수련병원이다. 800~1000병상의 이들 병원은 각 지역 환자의 특성이 반영된 임상 경험을 고루 익힐 수 있는 배경이다.

박 부학장은 “전문영역 습득을 위해서는 다양한 임상 경험에 노출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조금씩 다른 병원 시스템, 환자, 교수를 경험함으로써 풍부한 역량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

류장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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