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에세이] 지중해의 맛 상쾌한 로제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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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매년 이맘때면 너무나도 눈부신 프로방스의 햇빛과 지중해의 물빛이 생각난다. 1994년 5월의 일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연차총회가 프랑스의 니스에서 개최됐는데 사흘간의 회의일정 중 짬을 내서 나는 니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잡은 마티스 미술관과 샤갈 미술관, 그리고 지중해에 면한 마을 앙티브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 등을 찾아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인상파의 거장 세잔이 즐겨 묘사했던 그곳 프로방스 지방의 자연경관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눈부신 햇빛 아래 기복있는 구릉지대가 연이어 있고, 간간이 암봉이 솟아있는 틈새로 올리브 나무와 오래된 마을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프로방스 지방의 와인은 이런 자연경관처럼 상쾌하고 과실향이 풍부하다.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포도 재배가 시작된 곳이기도 한데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BC 6세기에 이른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도 생산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프로방스 와인의 중심은 로제 와인이다. 프랑스 제일의 산출량을 자랑하고 가격도 저렴한 로제 와인은 상쾌한 맛과 향이 지중해의 풍부한 어패류(魚貝類)와 잘 조화되고 색조가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으론 프로방스의 와인 중에서도 특히 무르베드르종(種)을 많이 사용하는 반돌(Bandol) 지역의 와인을 좋아한다. 유명한 로제 와인도 좋고 농후한 색조와 풍부한 탄닌맛이 돋보이는 레드 와인도 좋아한다. 나와 반돌 와인과의 인상적인 만남 역시 이 여행에서 이뤄졌다. 니스에 도착한 날 '바다의 이빨(Les dents de la Mer)'이라는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에서 마르세유 식의 요리인 부이야베스를 먹었는데 그 비린내를 말끔하게 없애준 것이 반돌의 로제 와인이었다.

또한 해변가의 네그레스코 호텔에서 프로방스식 송아지 사태찜에 곁들인 자극적이고 농후한 탄닌 맛의 반돌 레드 와인에도 나와 함께 한 일행 모두 매료되었다.

여행의 마지막날엔 칸 교외 무장의 유명한 식당 '무장의 풍차(Moulin de Mougins)'에서 포이약의 샤토 랑쉬 바쥬를 곁들인 저녁을 마친 뒤 레스토랑의 넓은 마당을 거닐었다. 1백~2백년은 족히 됐을 법한 올리브 고목(古木)의 가지 사이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들이 당장 쏟아져 내릴 듯 빛나고 있었다.

<끝>

김명호 한국은행 前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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