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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부산으로] '썬데이서울' 훔쳐볼까, 군대 얘기 들어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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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위부터) 피터팬의 공식, 썬데이 서울, 용서받지 못한 자

영화제의 묘미 가운데 '발견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부산의 관객들은 너무 잘 아는 모양이다. 전 세계 크고 작은 영화제를 통해 평판이 검증된 작품을 망라한 '월드시네마'부문의 초청작은 물론이고, 부산영화제의 유일한 경쟁부문인 '새로운 물결'에 초청된 국내 신작 세 편 역시 개막전에서 매진되면서 화제작 자리를 선점하고 있다. "유망한 국내 신인들의, 여느 해보다 다양한 경향이 여럿 선보이는 점에 관객들의 관심이 쏠린 것 같다"는 것이 허문영 프로그래머의 관측이다.

신인 감독들의 다양한 경향은 '피터팬의 공식'과 '썬데이 서울'만 비교해도 바로 드러난다. '썬데이 서울'은 왕년의 대중잡지 이름을 본뜬 제목처럼 "흔히 싸구려로 치부되는 취향에 진정한 애정을 담뿍 담은 영화"라는 것이 프로그래머의 소개다. 무협.공포.코미디를 뒤섞는 기발한 감수성으로 세 편의 에피소드를 일종의 옴니버스 형태로 연결했다.

반면 '피터팬의 공식'은, 프로그래머의 말을 빌리면, "쌉쌀한 성장통을 빼어나게 그린 영화"다. 고교 수영선수였던 주인공이 어머니의 자살시도 이후 생의 의욕을 잃고, 낯선 여성들과 부닥치면서 소년에서 어른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서정적이면서도 극적으로 그려낸다. '피터팬의 공식'은 충무로 조감독 생활을 거친 조창호 감독, '썬데이 서울'은 영화프로듀서 출신인 박성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흔히 한국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군대 얘기라고 하는데, '용서받지 못한 자'가 앞서 두 편과 함께 매진 행렬에 동참한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명문대에 다니다 입대한 주인공은 내무반의 불합리한 문화를 납득 못하고, 그나마 중학교 동창인 선임병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생활해간다. 언뜻 피해자처럼 보였던 인물이 의도하지 않은 가해자가 되는 과정을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긴장감 있게 묘사한다. 군대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조직문화에 대한 신랄한 은유로 읽힌다. 지난해 중앙대 영화과를 나와 졸업작품이자 첫 장편으로 부산에 초청된 윤종빈 감독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남자가 경험하는 일인데도, 아무도 안 하니까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탄탄한 만듦새를 보고 있노라면 가편집 단계까지 들인 돈이 요즘 한국 상업영화 평균제작비의 1% 수준인 3000만원대라는 게 놀라워진다. 사실 제작비 얘기라면 '크리틱스 초이스'부문에 초청된 '좋은 배우'를 빼놓을 수 없다. 3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고시준비를 하다 뒤늦은 열정을 따라 극단에 입단한 주인공이 겪는 갈등을 통해 다양한 인물군상이 생동감 있게 그려진다. 후반작업까지 총 제작비가 단돈 400만원이다. 연출부로 충무로를 몇 차례 노크하다 직접 영화를 만드는 길을 선택한 신연식 감독은 "그것도 제 영화로는 큰 제작비"라고 말한다. 지난해 독립영화제에서 상영한 첫 장편은 겨우 80만원에 만들었다는 얘기다. 저예산인 탓에 '용서받지 못한 자'와'좋은 배우' 모두 배우들에게 출연료를 주지 못했지만, 저마다 자연스러운 연기가 상당한 조화를 보여준다.

허문영 프로그래머는 "중견 감독들이 내놓은 '어른들의 영화'역시 올해의 중요한 흐름"이라고 짚어낸다. '한국영화파노라마'부문에 초청된 '연애'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대표적이다.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은 충무로 바깥에서 꾸준히 독립적인 영화작업을 해온 전수일 감독의 신작이고, '연애'는 오석근 감독이 '백한번째 프로포즈'이후 10여 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연애'는 이혼 뒤 생활고에 시달리다 술집에 나가게 된 주부가, '개와 늑대…'는 북한의 친척과 중국에서 상봉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영화감독이 각각 주인공이다. 이런 설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짐을 짊어진 어른들의 욕망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고 프로그래머는 평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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