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범인 동기불명 살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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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청산가리의 학명은 시안화칼륨이다. 화학기호 KCN, 무색의 결정체, 좁쌀알만한 0·15g의 극소량으로 사람의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가는 독극물.
2건의 미스터리 살인사건은 청산가리로 빚어졌다.
서울 천호동 강동카바레웨이터 신동찬씨(25)에 이은 을지병원 입원환자 염필수씨(37)의 잇단 독살극. 무색의 결정체가 전율을 몰고오고있다.
제1사건(카바레 웨이터독살)은 지난달17일 벌어졌다. 경찰이 이사건의 단서조차 잡지못하고 미로를 헤매는동안 40일만에 범인은 투명인간처럼 나타나 제2의 살인을했고 두사건의 사이에 또 한사람의 목숨을 노렸다가 미수에 그쳤다.
수사학에서 남에게 죽음을 당한자는 죽어야할 이유가있고 수사도 바로 이 이유규명에서 시작된다고했다.
그러나 독살된 신씨나 염씨나 죽음을 당해야할 필연적 피살이유를 갖고있지않다. 이 두사람은 불특정인이고 또 집합 군중속의 한사람과같은 살인동기의 아웃사이더들인 것이다.
사건의 심각성은 바로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지않는 살인이 무색 무취의 치명적 독극물로 대중소비되는 음료수를 통해 저질러졌다는데 있다.

<피해자주변>
제1사건의희생자 신씨는 6년전 홀어머니까지 여의고 78년말쯤부터 강동카바레에 취직, 웨이터보조로 월20여만원씩을 벌어 어렵게 살아왔다.
동료사이에서도 착실한 청년으로 소문났고 누구와 말다툼을 벌이는 일도 없어 원한을 살일도 없었다.
단지 사건당일 동료 여자웨이터 구재송씨를 만나 일일결산을 하려고 여자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선반에 놓여있던 유산균음료를 마신것이 죽음의 원인이 됐을 뿐이었다.
제2사건의 희생자 염씨는 부인과 1남1녀를둔 가장. 양품점을 경영, 빚은 많으나 맞벌이 부부로 그런대로 생활을 하고있고 「여호와의 증인」의 독실한 신도다.
부인 김연주씨(39)와는 12년전 중매 결혼, 지금껏 부부싸움한번 없었던 금실좋은 부부로 알려져있다.
성격은 온순한 편이며 어렸을때 왼쪽다리에 관절염을 앓아 보행이 불편했고 양품점을 차리기전엔 S정밀의 수위노릇을 하기도했다.
가정적으로나 그의 사업규모나 성격, 과거의 경력을 보아 독살을 당할만큼 모난데가 없다는 것이다.

<연관성>
제1사건과 제2사건 (을지병원최명근씨 독살기도·16일), 제3사건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지을수있는 여러가지 특징을 갖고있다.
범행에 사용한 물질이 청산가리(제1, 3사건)·파라티온(제2사건)등 치명적인 극약이었고 극약을 탄 음료수는 B요구르트(제1, 2사건)·B초컬릿우유(제3사건)를 선택, 우연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B사 제품이 쓰여졌다.
제1사건은 유산균음료 2개, 제2사건은 유산균음료16개, 제3사건은 우유5개를 독극물 전달체로 이용, 최소 2명 이상의 살해를 기도한 점도 유사하다.
전문가들도 「한스구로스」(오스트레일리아의 형사학자)의 범죄수법 특성분류실의 관행성과 반복성 (극약사용·음료수사용·대중집합장소선택등)을 예로들어 이 3개의 사건은 동일범에 의한 동일사건이거나 일단 성공으로 끝난 제1범행을 흉내낸 모방범죄로 볼수있다고 분석했다.
여자가 범인으로 부상되는 점도 공통점. 제1사건에서는 ▲여자화장실을 범행장소로 택했고 ▲유산균 음료를 맡겼던 40대여자가 있었으며 제2사건에서는 ▲여자의 전화가 걸려와 유산균음료가 있는곳을 알으켜주었고 제3사건에서는 여자가 우유봉지를 건네주었다.
이같은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즉 ▲카바레 화장실과 병원이라는 특수한 환경의차이 ▲용의자의 연령차이(제1사건 40대, 제3사건 20대) ▲특히 제2사건의 경우 환자최씨를 지적해 전화를 걸어온점등 3개사건 모두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보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목적범행>
제3사건의염필수씨 독살은 ▲교통사고 합의에 따른 가해자측과의 갈등 ▲염씨의 사업에 얽힌 원한 ▲부채관계 ▲병원에 대한 원한이나 우유및 유산균업계의 경쟁업자간의 범행가능성을 추정할수있다.
교통사고 합의금은 염씨측에서 1백35만원을 요구한 반면 가해자측은 30만원을제의, 타결이 안된 상태지만 이때문에 양측이 크게 다툰적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합의가 늦어져 가해운전사가 징역8개월을 선고받게돼 약간의 서운함은 있었을 것이나 심각한 대립관계는 아니라는것이 양쪽의 주장이다.
염씨의 사업은 화장품대리점·양품점등 점포3곳으로 알려졌지만 몸이 불편한 염씨를 대신해 부인이 거의 꾸려나가는 형편이고 부채 8백여만원도 큰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제2, 3사건을 볼때 병원에 대한 불만이나 원한을 해소하기위한 「보복범죄」의 가능성도 있다.
어느 병원이나 의료사고 또는 입원비 체불등으로 환자의 재산압류등 병원과 환자가 대립하는 경우가 잦은 편이지만 을지병원측은 올들어 이같은 분쟁은 없었다고 밝혔다.
강동카바레사건의 경우 경찰은 ▲업주 또는 종업원과 관련된 갈등이나 원한 ▲업소간의 경쟁등을 집중조사했지만 단서를 찾지못해 결국 「동기없는 살인」으로 끌어가고 있다.

<무동기살인>
숨진 염필수씨의 장남진성군(11)의 범인 목격 진술로 미뤄 염씨는 우연하게 범행대상으로 선택되었다.
이같은 이유는 ▲범인이 『아버지가 입원했느냐, 어머니가 입원했느냐』물었고 ▲진성군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입원했다』고 대답하자 ▲범인은 『아버지에게 갖다드려라』며 우유봉지를 맡겼다는등의 대화내용으로 볼때 범인은 염씨나 진성군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범인이 진성군에게 『나는 사고운전사 부인의동생이다』고 한점은 염씨가 교통사고로 입원한 사실을 알고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있어 면식범이 아니라고 단정하기엔 의문점이 많다.
제2사건의 경우도 『식당에있는 여자』라고 모호하게 신분을 밝히면서 최명근씨를 지명해 바꿔달라고했던 점은 범인이 피해자와 연관이 전혀 없을것이라고 추정할수도 없다는것이다. 더구나 사건당일 최씨침대머리맡에 도루코면도날 3개가 발견된것도 간과할수없는 의문점이다.

<이상성격범행>
자신의범행으로 멀쩡한 사람이 괴로와하고 죽어가는것을 상상하는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변태적인 범행으로도 추정할수있다.
그러나 범인은 26일밤 경찰이 삼엄한 경비와 수사망을 펴고있는 가운데 『최소한 20명을 죽이겠다』는 편지를 병원화장실에 갖다두었다. 또 강동카바레사건때도 사건 다음날 독이든유산균을 화장실에 다시 갖다둔점등은 범인의 대담성과 병원이나 카바레등 특정대상을 골탕먹이려는 목적성을 보이고 있어 이상성격자의 소행만으로 단정하기는 미흡한점이 많다.
한수사관계자는 범인이 사회혼란과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려한것이 아니냐고 추리할정도로 종잡을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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