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대학 연구비가 경쟁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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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896년 아테네 대회를 계기로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탕 남작은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강하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올림픽 경기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종목 중의 하나는 장대높이뛰기다. 자기 키의 거의 세배가 되는 높이에 걸린 바를 아슬아슬하게 넘고는 '더 높게' 다시 한번 도전한다.

수년 간의 노력 끝에 이룬 자신의 기록을 단 1 ㎝라도 경신하는 것은 초창기에 기록을 10㎝ 향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과학 연구업적을 SCI(Science Citation Index.과학인용지수) 논문 수로 계량화하는 것이 보편화하고 있다. 국가 전체로도 그렇고, 연구자 개인으로도 그렇다.

타당성 여부에는 논의의 여지가 많지만 SCI가 하나의 현실적 지표임은 사실이다. 2002년에 국내 연구기관이 발표한 SCI 논문 전체 편수는 1만4천9백16편으로 세계 순위로는 전년보다 1단계 상승한 13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과 같은 순위다. 교수 1인당 논문 수는 학부 과정이 없는 광주과기원이 5.34편으로 국내 1위고, 대학원생 1인당 논문 수는 포항공대가 1위다.

지난해, 2001년에 발표한 서울대의 SCI 논문 총수가 세계 대학 중에서 40위라고 했을 때 나는 연구의 전통이 길지 않은 서울대가 그만한 업적을 내었다니 하고 적지 않게 감동했다.

그리고는 장대높이뛰기에서 기록을 단 한치 향상시키기가 어렵듯 이제는 그 기록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유럽에는 수백년의 전통을 지닌 명문 대학들이 허다하고, 미국에는 세계 1위의 자리를 고수하는 하버드 등 초일류 사립대학들뿐 아니라 막강한 주립대학만 해도 수십개가 된다.

이런 대학들은 대학원 연구인력의 절반 가까이를 중국.대만.한국.인도 등의 최고 브레인들이 공급해 주고 있다. 우리 대학들은 기껏 치열한 입시 경쟁을 통해 선발하고 교육시킨 우수한 학생들을 주로 미국 대학원에 열심히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학에서는 보통 교수 2인당 한명의 비서가 연구비 관리, 서류 작성 등 모든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 우리는 교수들이 직접 연구비를 관리하고 영문 편지를 작성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교수들이 입시에 대거 동원되는 나라는 다시 없을 것이다.

서울대의 연구시설이나 연구비는 미국의 2류 대학 수준이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서울대는 2002년에 전년보다 6등급 상승한 세계 34위에 해당하는 수의 SCI 논문을 발표했다. 높이뛰기 기록을 단숨에 한 뼘만큼 향상시킨 격이다.

미국이 과학기술력에서 전세계의 절반 정도의 몫을 차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하버드.MIT.칼텍.존스홉킨스.펜실베이니아.코넬 등의 명문 사립대학들과 캘리포니아.워싱턴.일리노이.위스콘신.텍사스 등의 명문 주립대학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수월성을 추구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 상위 대학들이 전체 연구비의 절반을 훨씬 넘는 몫을 담당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지방대학을 미국의 주립대학처럼 육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 전체 연구비의 증가를 통해서 이루어져야지, 제한된 연구비를 인위적으로 분산시키는 방식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어렵게 여기까지 끌어올린 서울대의 연구 역량을 쇠퇴시킨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될 것이다.

김희준 서울대 교수 화학